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ㆍ박중서 옮김
미메시스 발행ㆍ344 쪽ㆍ2만6,800원
"개인의 세계관은 그 기원이 어찌하든 간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고 여러분은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현실인식을 자유자재로 변형시켜 다른 사람의 현실인식과 중첩시킬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멋지지 않겠는가?"
뉴욕 맨해튼의 낡은 아파트.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이 내리치는 어느날 밤, 막 50세 생일을 맞은 사내가 혼자 침대에 누워 포르노비디오를 보고 있다. 별안간 거대한 벼락이 떨어져 아파트는 화염에 휩싸이고, 수중에 남은 돈을 챙겨 허겁지겁 집을 빠져나온 사내는 자신의 아파트가 불타오르는 광경을 무연히 바라본다. 사내의 이름은 아스테리오스 폴립. 그리스계 미국인 건축가인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그가 발표하는 논문은 학계의 칭송을 받았고 수많은 설계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이지적이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냉소적인 자신과는 달리 감성적이고 낙천적인 사랑스러운 아내 하나도 있었다. 그러나 아내도 떠나고 자신의 전 재산이 잿더미로 변한 뒤 갑자기 닥쳐온 중년의 위기.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까.
미국 만화가 데이비드 마추켈리(50)가 2009년 발표한 그래픽노블(소설처럼 길고 복잡한 스토리를 가진 만화) <아스테리오스 폴립> 은 자신이 고수했던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며 내면적으로 성숙해가는 사내의 이야기다. 성장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떠남'의 구조다. 그러나 서사는 직선적이지 않다. 어포지라는 한 시골마을의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직한 아스테리오스의 현재와 답답했던 과거, 그리고 환상이 불쑥불쑥 끼어들고 난데없이 포개진다. 뛰어난 텍스트들이 흔히 그렇듯 작품은 여러 층위로 짜여있다. 정신적 성장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교양소설적 요소도 강하고, 열정을 회복하고 떠나간 사랑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연애소설의 느낌도 난다. 예술적 개안(開眼)이라는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예술가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스테리오스>
말풍선, 서체, 색채 등 만화적 장치를 섬세하게 활용해 캐릭터의 개성을 살려내는 솜씨가 장인적이다. 단 한 번 나오는 엑스트라까지 모든 캐릭터들의 말은 각각 다른 서체를 사용했다. 이지적인 아스테리오스가 서사의 중심이 될 때는 푸른색의 배경을 앉혔고, 감성적인 하나가 중심이 될 때는 분홍색 계열로 배경을 깔았다. 시골마을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간 아스테리오스가 찾아간 건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하나의 집. 어색해하던 남녀는 옛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친밀감을 회복한다. 말풍선의 말꼬리는 처음에 따로따로 그려졌다가 점점 얽혀들어가는데, 두 남녀의 감정이 고조됨을 보여주는 장치다.
작가가 숨겨놓은 알레고리를 찾아가는 지적 탐험도 즐겁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으나 다른 형제가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던 아스테리오스는 평생 결핍감에 시달리는데, 그가 자신의 인생관을 설파하는 만화의 칸에는 마트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 알렉상드르 뒤마의 <철가면> , 애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 이 놓여있다. 모두 쌍둥이 또는 도플갱어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인터넷에는 <아스테리오스 폴립> 에 숨겨진 알레고리를 찾는 사이트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머리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 만화다. 아스테리오스> 어셔가의> 철가면> 왕자와>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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