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스티븐 맥커리 작품‘아프간 소녀’의 눈빛이 살아있다. 직접 가서 만져보기 전까지는 그림인지 사진인지 자수인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는다. 실제 만져본 후에도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가수 셀린 디온은 자신을 자수로 표현한 이씨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스티븐 맥커리도 자신의 작품사진이 자수로 재탄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힙합그룹 블랙아이드피스는 이씨 작품 속 포즈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작품을 만든 주인공은 바로 손자수로 발명특허를 받은 이용주(53)씨다.
세계 최고 손자수 작가를 꿈꾸다
그는 철도고등학교 졸업 후 1976년 철도청에서 통신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81년 KT 전산사업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원을 다니며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등을 배웠고, 일을 그만둘 때까지 전산사업단에서 프로그램 개발과 전산교육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직장인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글쓰기와 그림 작업을 계속했고, 이씨의 노력은 성과물로 빛을 발했다. 소설 가운데 일부는 단편집으로도 출간됐다. 동양화를 그려 한국문화협회로부터 상도 받고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96년 20년간의 회사생활을 마친 후 전업작가를 해볼까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것을 찾아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수를 잘 놓으시던 할머니의 전통자수를 활용해보면 어떨까 고민하게 됐고 연구와 작업을 거듭하다 2004년에‘사실감이 풍부한 손자수 방법 및 손자수물’로 발명특허까지 받았다. 그는 “특허를 받지 않았으면 이 작업을 포기하려고 했다”며 “이후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업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손자수 작품이 생계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쌀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작품을 헐값에 팔아 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해준 건 든든한 가족이었다. 가족들은 세계최고의 자수장인을 꿈꾸는 이씨를 보며 함께 행복해 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실제와 똑같이
그는 손자수 작품을 만들 때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이나 명화, 사진을 그대로 구현하는 데 초점을 뒀다. 초기에는 자신의 작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예전 것들을 모방했지만 이는 그의 자수기법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기하학적 무늬와 장식성에 도전하기 위해 그의 100여점의 작품을 똑같이 자수로 만들었다. 고흐의 작품에서는 붓 터치와 파스텔톤을 어떻게 자수로 표현할 것인지 연구했다. 르네상스 시대 성화 작품을 통해서는 인물을 사실감 있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그가 96년부터 14년간 완성한 작품은 300여점이나 된다.
그가 작품을 공개한 것은 2005년부터다. 당시에는 입소문만으로 개인이나 기업이 선물용으로 그의 작품을 주문해갔다.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8년 서울 용산구 한강로 용산아이파크몰에서 클림트 복제 손자수를 포함해 10여점을 전시하면서부터다. 2009년에는 성남시 성남아트센터에서 ‘혼(魂)자수 이용주전’을 열었다. 현재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에서 그의 작품을 일부나마 만나볼 수 있다.
창의적 디자인 작품한다
그는 “그동안 명화를 훔쳤지만 이제부터 나만의 창의적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밖으로 드러난 풍경과 인물, 명화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다면 지금부터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독창적인 작업에 주력함으로써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얘기다.
이씨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문명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형상과 색감을 보면 ‘아!이용주꺼다’라고 알 수 있는 작품을 내놓겠다는 포부다. 이 모든 노력은 제2의 인생에서 예술적 지평을 본격적으로 열어보려는 이씨의 바람에 따른 것일 터다.
그는 요즘 그동안 작업한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찾고 있다. 그는 약 10년간 30명과 함께 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작품을 자수로 표현한 90여점을 완성했다. 그는 “90여점의 손자수 명화는 대부분 원작 사이즈로 제작했다”며 “우리 자수의 섬세함과 작품의 예술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 입체감 살린 손자수로 발명특허
세밀화와 같은 정교한 자수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용주씨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자수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비단천에 대상의 세부와 음영, 입체감 등을 표시해 밑그림을 그린다. 이어 필요한 굵기에 맞춰 비단실을 고르거나 꼰 다음 염색을 한다. 이 작업이 어렵다. 실제와 똑같은 색감이 나올 때까지 재료를 조정하며 색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업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것이다. 이때 실을 중첩해서 수를 놓아 볼륨감을 더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이씨는 “주로 사진을 찍어 보면서 작업을 한다”며 “특히 인물을 표현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어도 자기 모습 같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인데 수를 놓아 인물의 표정까지 그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 이외에 상상을 가미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는 2인이 작업할 경우 1년 6개월 가량 걸린다.
초기엔 혼자 했지만 공방을 차린 10년 전부터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한다. 공방에서 수를 놓는 사람들은 30명 가량이다. 이들은 전체 그림을 부분으로 나눠 각자 수를 놓는다. 이씨는 이 과정을 일일이 점검하며 전체 그림으로 합친 후에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뜯어내고 다시 수를 놓는 과정을 거쳐 작업이 최종적으로 끝난다.
그는 “자수법을 배운 이들을 외부업체에서 스카우트를 해가는 사례가 많다”며 “공방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보안상 공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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