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시청 부근 리볼리 거리. 일방통행인 3개 차로 가운데 오른쪽 1개 차로가 버스전용차로이다. 승용차가 달리는 2개 차로와 콘크리트 방지턱으로 분리된 버스전용차로에는 버스뿐만이 아니라, 택시, 자전거가 함께 달린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동차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파리 시내에는 자전거전용차로 외에도, 이처럼 자전거가 버스, 택시와 함께 달릴 수 있는 도로가 많다. 자전거가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프랑스 일주 사이클 대회 ‘뚜르 드 프랑스’가 있을 정도로 프랑스에는 자전거가 인기가 있지만, 그것은 레저스포츠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다 2007년 7월 파리 시의 자전거 공공임대제도 ‘벨리브(Velib)’ 시행 이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고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하나로 자리잡게 됐다. 도시 내에서 자동차 운행을 줄여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파리시의 친환경 교통정책의 하나로 추진된 자전거 이용 확대가 성공적으로 정착된 것이다. 파리 시의 성공은 세계 여러 도시들에 자극을 주어 자전거 활성화 붐이 일었다.
파리 시내 어느 거리에서도 손쉽게 벨리브 정차장을 만날 수 있다. 모두 1,450개의 정차장에 2만600대의 벨리브 자전거가 있다. 2009년 파리 시에 인접한 29개 코뮌(기초자치단체)에 추가 배치된 1만5,000대까지 포함하면, 현재 파리 시 일대에는 벨리브 자전거 3만5,00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 이 벨리브 자전거들은 하루 평균 12회 이용된다. 모두 합하면 하루 40만회 가량의 교통 수요를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벨리브 자전거는 30분은 무료, 1년 회비는 29유로(4만5,000원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 벨리브(Velib)는 프랑스어 자전거(Velo)와 자유(Liberte)의 합성어. 말 그대로 이용자가 자유롭게 필요할 때 정차장에서 꺼내 목적지까지 이동한 뒤 가까운 정차장에 세워두면 된다. 개인 소유 자전거라면 집으로 도로 가져가야 하지만 벨리브 자전거는 그런 부담이 없다. 이 때문에 몽마르트르 언덕이나 벨빌 언덕처럼 고지대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 아침에 출근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다가 저녁에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 시는 어느 정차장의 자전거가 완전히 비거나 넘치지 않도록, 트레일러가 딸린 작은 트럭 15대로 자전거를 이동시켜 준다. 종전 2% 정도였던 파리 시내의 자전거 이용률은 벨리브 시행 후 4~5% 수준으로 늘어났다. 불과 2~3년 만에 자전거 이용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벨리브는 파리의 풍경과 생활패턴을 변화시켰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어느 도로에서나 자전거를 탄 시민들을 볼 수 있다. 전에는 자전거를 절대로 타지 않았던 대기업 임원 같은 점잖은 체면의 중년들도 바구니에 가방을 싣고 자전거로 출퇴근할 정도로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전철과 버스가 끊긴 심야에 벨리브 자전거로 귀가하는 것도 새로운 풍속이다. 시민 카멜 라리드(29)씨는 “자전거를 타면 매연이 없어 환경에도 좋을 뿐 아니라 운동이 돼 건강에도 좋다”면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와는 달리 술을 조금 마셔도 괜찮고, 주말에는 벨리브 자전거를 이용해 파리 시내를 돌며 20여명의 친구를 차례로 만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통사고가 가끔 일어나지만 자동차 운전자들도 이제는 자전거에 익숙해져 조심스럽게 운전하게 됐다.
이처럼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보행자를 우선하는 파리 시의 교통정책은 2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 당초 파리 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복구 사업 이래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자동차 소통 중심의 교통정책을 폈다. 그러다 1974년 당선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팽창적인 교통정책을 멈췄고, 자크 시라크가 파리 시장에 당선된 1990년 이후에는 보행자 위주로 중점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는 자동차 교통을 더 이상 증가시키지 않는 것을 목표로, 1995년 이후에는 주차장 요금 인상, 버스전용차로 확대 등 자동차 교통 수요를 감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정책 변화가 이뤄졌다. 2001년 사회당 소속의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시장이 된 후로는 더욱 강도 높게 2020년까지 자동차 운행을 40% 감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교통수요 억제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파리 시내 자동차 보유 대수는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10%가 감소했고, 1999년부터 2006년 사이에 다시 10% 감소했다. 파리 시는 의외로 작다. 면적이 105.4 ㎢로 서울의 6분의 1 정도이며, 인구는 220여만명으로 서울의 5분의 1 정도다. 인구 밀집도로 보면 미국 뉴욕의 맨해튼이나 일본 도쿄의 중심지와 비슷하다. 파리 광역권인 일드프랑스 주에는 1만2,011㎢에 1,100여만명이 거주한다.
파리 시내에 자동차 운행이 많았던 것은 파리 시민보다는 주변, 즉 일드프랑스에 거주하는 주민湧?자동차를 많이 갖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파리의 가구당 자동차 보유 대수는 0.42대에 불과하고 점차 감소하고 있다. 일드프랑스는 1가구당 평균 1대이고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파리 시는 벨리브의 성공에 힘입어 파리를 둘러싼 77개 코뮌과 함께 전기자동차 공공임대 서비스인 ‘오토리브(Autolib)’도 추진 중이다. 현재 진행중인 사업자 선정 작업이 끝나는 대로 주차공간 확보, 충전시설 설치, 자동차 제작 등을 거쳐 2011년 말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운영 규모는 4,000대, 전부 공해 없는 전기자동차로 하되, 벨리브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빌릴 수 있고 아무 정차장에나 갖다 놓으면 되는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파리의 또 다른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센 강을 운행하는 수상버스 보게오(Vogueo)가 있다. 전철 정기권만 있으면 이용 가능하지만 노선이 전철 노선과 비슷해 이용객은 그다지 많지 않아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파리 시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교통수단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이를 유지하고 있다.
파리 시 교통정책 입안 책임자 프랑수아 프로샤송 씨는 “파리 시의 교통정책은 대중교통, 지상전철(트램), 자전거 이용 증진 등을 통해 도로나 공원 등 공공 공간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서 “현재 도입을 검토 중인 양방향 통행 자전거전용도로 등과 함께 보행자를 위한 공간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파리= 글ㆍ사진 남경욱기자 kwnam@hk.co.kr
■ 국내 사례 - 경남 창원시의 ‘누비자’
경남 창원시의 ‘누비자’는 국내 최초로 도입됐고 또한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꼽히는 자전거 공공임대 서비스다. 누비자는 프랑스의 벨리브와 마찬가지로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누구나 자유롭게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누비자’는 우리말 ‘누비다’와 ‘자전거’의 합성어.
누비자 자전거와 전자장치, 자전거 무인대여소인 터미널, 대여정보 관제시스템 등 운영체제는 창원시가 민간과 함께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회원 가입비는 1년에 2만원, 1개월에 3,000원이며, 대여 후 2시간까지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초과하면 30분당 500원씩을 내면 된다.
2008년 10월에 터미널 20곳, 자전거 430대로 출발한 누비자는 2년여가 지난 올해 12월 현재 150개 터미널에 자전거 수는 2,530대로 늘어났다. 그 동안 회원으로 가입한 창원 시민이 6만5,000여명에 이르고 하루 평균 이용횟수는 8,000~1만회 정도이다.
누비자 도입 2주년을 맞아 창원시가 지난 10월 회원 1,4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용자의 86.3%가 ‘만족’ 또는 ‘매우 만족’이라고 응답했다. 지난해의 75%보다 11.3%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이용자의 연령대는 20대가 41%로 가장 많았고 이어 30대 19.3%, 40대 17.3%순으로 나타났다. 이용 목적으로는 통근ㆍ통학이 46.7%로 가장 많았고, 여가 선용 27.2%, 업무 관련 방문 7.7%, 문화시설 방문 4.9% 등이었다.
누비자의 성공 요인으로는 시의 적극적 지원과 관심, 창원이 계획도시로 자전거전용도로가 전국 최장인 100.1km나 구축돼 있었던 점 등이 꼽힌다. 창원시는 내년에는 지난 7월 행정구역을 통합한 마산, 진해 지역까지 누비자를 확장하기 위해 전문기관에 연구용역을 의뢰해놓고 있다.
남경욱기자
■ 인터뷰 / 앙드레-마리 부흘롱 파리 시 도시계획연구소 부소장
“자전거 공공임대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전거 이용에 대한 다양한 수요가 있어야 합니다.”
서울시와 비교한다면 시정개발연구원에 해당하는 파리 시 도시계획연구소의 앙드레-마리 부흘롱 부소장은 벨리브의 성공 비결을 묻자 “출퇴근, 쇼핑, 거주용, 관광 등 다양한 수요가 있어서 어떤 벨리브 정차장이든 완전히 차거나 비지 않는 상태, 즉 적절한 수의 자전거가 유지되는 자동조절 기능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 핵심”이라고 밝혔다.
도시계획연구소는 벨리브 시행 전 파리 시민들의 교통 행태와 수요를 자세히 분석해 벨리브 정차장 배치도를 마련했다. 파리 시내 전 지역을 200㎡ 단위로 세분해 출퇴근, 쇼핑, 거주용, 야간이용 등에 따른 자전거 수요를 측정했다.
부흘롱 부소장은 이어 파리가 유럽의 도시 가운데 가장 인구가 밀집돼 있어 시내 교통의 55%가 도보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외에 16%가 자동차, 2%가 자전거, 나머지는 대중교통이다. 이는 벨리브가 시작되기 전인 4년 전의 수치다. 출퇴근하는 사람의 경우 4분의 1이 도보를 이용한다. 파리 시내에 거주하는 사람은 220여만명인데 일자리 수는 170만개나 된다. 도보 이용이 많은 만큼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택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자전거 이용율이 25%에 이르는 암스테르담 등에 비하면 파리의 4~5%는 낮은 수준이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암스테르담은 파리에 비해 대중교통이 발달돼 있지 않아 그렇다. 도보 이용률도 암스테르담이 훨씬 낮다. 파리 시내에는 어느 곳이든 400m 거리 이내에 전철역이 최소한 1군데는 있는데, 인구 200만명의 도시에 이 정도로 빽빽한 전철망을 가진 도시는 파리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흘롱 부소장은 마지막으로 20년 전 파리 시의 교통정책이 자동차 위주에서 보행자 위주로 선회한 것에는 아주 ‘단순한’ 정치적 논리가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파리 시내 가구의 절반은 자동차가 없고, 또 자동차를 갖고 있는 가구의 절반은 1주일에 1~2회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75% 이상의 주민들이 자동차 피해가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주민들의 실생활과 여론에 따른 정책의 시행, 그것이 파리가 다시 인간 중심 도시를 꿈꾸게 된 계기라는 말이었다.
파리=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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