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리 성리학을 주창한 회재 이언적에게는 학문과 효심이 깊은 친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의 대를 이은 사람은 양자로 들인 종질(從姪) 이응인이었다. 친아들 이전인이 후실과의 사이에서 난 서자였기 때문이다. 대를 이은 서얼의 한은 이전인의 아들 이준이 선조 때 납속허통을 받아 과거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16일 밤 10시에 방송하는 KBS 1TV ‘역사스페셜’의 ‘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조선 서자들의 500년 도전사’ 편은 조선조 시대의 불운아 서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태종은 서얼차대 정책으로 서자들의 손발을 묶었다. 고려 때 만연한 병축(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을 금지하고 적첩을 철저히 구분하는 한편, 서자들의 과거 응시와 관직 등용을 막았다. 양반가 자제인 서자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태종이 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알아본다.
선조 16년에 일어난 여진족의 니탕개란을 계기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전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울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것.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는 했지만 서얼허통의 물꼬를 텄다. 서얼들도 힘을 합쳐 상소를 올렸고 왕이 지지기반을 넓히려 이들을 활용하면서 숙종을 거쳐 영정조 때에 이르러 서얼허통은 급물살을 탔다.
서자 신분으로 부사까지 지낸 이준은 은퇴 후 고향에서 새로운 갈등에 부딪쳤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뭉쳐 서얼들의 진입을 막은 것. 삶의 기반인 지역사회에서 거부당한 이준은 일흔 한 살의 나이로 절절한 청원서를 썼지만 그의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얼과 지방 사족 간의 향전(鄕戰)은 19세기 후반에야 서얼들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영남의 서원들에도 큰 영향을 끼친 1884년 옥산서원의 서얼소통 조치의 전말을 알아본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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