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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5> 몸서리 나는 좌우익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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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5> 몸서리 나는 좌우익의 갈등

입력
2010.12.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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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의 갈등이라니?

요즘으로는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후부터 시작해서는 6ㆍ25전쟁 직전까지, 좌우익의 갈등은 이 나라의 역사를 흔들어댔다. 국민들을 못살게 굴었다. 좌익은 공산주의 집단을 가리킨다. 그 당시로는 북한과 동조해서 정치운동을 하는 집단을 좌익이라고 일컬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익이라면 자유주의를 내세운 집단을 지칭했다. 그 당시는 미국과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얘기되곤 했다. 한데 좌와 우는 서로를 용납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숙적이고 원수였다. 사사건건, 아옹다옹 다투고 겨뤘다. 해방된 뒤 한참 동안 이 나라의 정국은 좌우 대립으로 말미암아서 편한 날이 없었다. 풍파가 계속되고 파란이 잇따랐다.

그 아주 그럴듯한 본보기 하나를 나는 해방 이듬해에 절실하게 겪었다. 마침 3ㆍ1 독립운동 기념일이었다. 어느 큰 공원에서 개최된 기념식전에 우리 학교는 단체로 참여했다. 중학교 3 학년이던 나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식을 탈 없이 마치고 막 식장을 나서는데, 난데없이 소동이 일었다.

“우익의 테러야!”

그런 아우성이 일었다.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저만치에서 몽둥이를 든 무리가 이리로 달려들고 있었다. 다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나도 흩뜨려진 무리에 섞여서 도망질을 쳤다. 앞을 달리던 학생들이 넘어지고 나도 달리다 말고는 엎어졌다. 용케 일어서서는 다시 내달렸다. 돌팔매는 계속 날아들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비명 소리가 귀를 째고 들었다. 무서웠다. 파랗게 질린 나는 떨면서 줄행랑을 놓았다.

나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의식을 하고 좌익의 무리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6학년 상급생들 사이에서는 좌익 세력이 컸던 탓에 거기 휘말린 것뿐이었다. 학교 전체가 참여하는 공식 행사에 빠질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돌팔매질과 몽둥이질 그게 바로 내가 겪은 좌우익의 갈등이었다.

학교 안에서도 좌와 우의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학생단체를 주도하는 무리가 좌익이냐 우익이냐에 따라서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6년제 중학교에서도 그 지경이었다. 좌익의 학생 단체는 학생동맹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우익의 학생단체는 학생연맹이라고 했다. 그래서는 동맹과 연맹이 세 다툼을 벌이고, 분쟁을 일으키곤 했다. 서로 소위 ‘사상(思想) 다툼’에 열을 올렸다. 학교 안인데도 그랬다.

그런 지악한 상황 속에서 나는 좌익에 가담도 않고 우익에 쏠리지도 않았다. 아예 무관심했다.

“알아서들 하되, 요란은 떨지 마! 싸우지도 마!”

그게 나의 사상이라면 사상이었다. 나는 우도 좌도 아닌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흰 빛도 아니고 붉지도 않았다. ‘영생 중립 국가’에 견주어도 좋을 처지가 바로 나의 것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좌익의 극단 분자와 우익의 극단분자 하나씩을 절친한 친구로 두게 되었다. 좌익 친구는 성질이 부드럽고 문학을 좋아하는 탓에 심금을 터놓고 사귀었다. 좀 까다로운 편인 우익 친구와는 서로 집이 지척으로 가까운 것으로 해서 터놓고 사귀게 된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들의 사상은 우리의 우정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나하고 친한 탓일까? 둘도 비교적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렇게 수삼 년을 지내고는 중학교 6년을 마치고 대학엘 들어갔다. 붉은 친구는 서울의 S대 공과대학생이 되고 흰 친구는 H대 공과대학생이 되었다. 그래서는 원수끼리는 다행스럽게도 갈라진 것이다. 나는 S대 인문대여서 어느 쪽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중립도 잘 지켜진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는 이내 6ㆍ25전쟁이 터졌다. 나는 재빨리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흰 친구는 몇 달 뒤에, 천리 피난길을 걸어 부산까지 가까스로 돌아왔다. 모처럼 다시 만나서 얘기를 주고받는데, 흰 친구가 피난 오기 바로 전에 서울에서 겪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의 무슨 특수 부대 요원들에게 붙들렸다고 했다. 그들은 내 친구를 부산서 서울까지 와서 대학을 다니자면 틀림없이 악질의 보수반동, 부르주아임이 틀림없다고 몰아붙였다.

“이 자본가의 아들 새끼, 너는 죽어!”

내 친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줄지어 서서는 총의 사격을 받았다. 그는 쓰러졌다. 한데 용케도 상처가 가벼웠던지 한참 만에 정신이 들었다. 시신들 틈에 끼어서 꼼지락 대고 있는 그를 본, 인민군 대장은 그걸 기적이라고 하면서 혀를 둘렀다.

“상당히 명줄이 센 놈이로군! 어디 사는 데까진 살아 보라우!”

흰 친구는 붉은 군대에 당한 일을 이같이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반 그 붉은 친구 소식이 없지? 북으로 간 모양이지?”

아마 그럴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빨갱이들에게 붙들렸을 ? 그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나서서 나를 구해 줬을 거야. 그치!”

나의 흰 친구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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