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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연극 '반도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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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연극 '반도체 소녀'

입력
2010.12.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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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연극) 한번 해 봤어요. 40여년 만의 무대인데 요즘 젊은 배우들과 호흡이 잘 맞네요. 그들이 힘겨운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연극 '반도체 소녀'에 지난 11일부터 출연, 나름의 열연을 펼치고 있는 오세철(67) 연세대 경영학과 명예교수의 소감이다. 그는 2008년 사노련 결성 등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피소돼 최근 징역 7년이 구형됐고, 내년 1월 공판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그런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소극장 혜화동1번지에는 연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 젊은이들 틈틈이 재야 인사, 야당 정치인 등 오래 전부터 이 연극을 예약하고 기다린 장년 관객들이 무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최근 대학로 여느 곳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풍경이다. '반도체 소녀'는 대기업 전자산업체에 근무하는 젊은 여성노동자가 백혈병 판정을 받아 사회적 주목을 받았던 사건을, 문화창작집단 날이 발빠른 대응으로 무대화한 것이다.

온 몸을 새하얀 방진복으로 감싼 채 무대 곳곳에 나타나 사건을 바라보는 소녀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10대다. 그러나 그것은 소녀의 혼백. 무대에서 죽음은 상존한다. 의사가 백혈병으로 진단한 사망 원인을 역추적해 나간다는 구조다. 죽음은 소녀의 몸을 빌어 거대 기업자본주의의 몰도덕성을 상징한다.

무대에 틈틈이 등장하는 오 교수는 대부분 맨 뒤켠 책상에서 책을 보는 학자의 모습이다. 그런 일상적 풍경은 그가 마지막 수업날 공산당선언의 단행본을 들고 등장하면서 바뀐다. 반도체 소녀 사건에 충격받은 그는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하거나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와 술자리를 함께하며 소녀의 상황을 무대에서 재현시키는 역할을 한다. 노동자들은 특정 기업의 이름을 패러디한 로고를 달고 나와 무대의 현실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무대에는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의 그늘이 적나라하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들만이 줄 수 있는 웃음이 공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검은색을 주조로 한 오른쪽, 온통 흰색인 왼쪽으로 반분된 무대가 인상적이다.

오 교수는 "소극장 무대가 (객석과) 이렇게 친밀한 것인 줄 몰랐다"며 나날이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배우들과의 앙상블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사실 이 무대가 노동연극 혹은 이념극이라는 전형성을 탈피할 수 있는 데에는 극단 연희단거리패, 극단 목화 등 기성 연극집단에 소속된 유능한 배우들의 힘이 크다. 그들은 생경한 이념보다 생생한 현실이 먼저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 무대가 암시하는 가능성이다. 작ㆍ연출자 최철씨가 극단 목화 대표 오태석씨의 제자라는 연분이 현실적으로 큰 몫을 했다. 내년 1월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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