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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4> 선·정릉(宣靖陵)의 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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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64> 선·정릉(宣靖陵)의 도굴

입력
2010.12.1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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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宣陵)은 성종릉(成宗陵)이고 정릉(靖陵)은 정종릉(中宗陵)으로 지금도 강남구 선릉역(宣陵驛) 근처에 있다.

정릉은 본래 고양 원당(元堂)에 있던 것을 문정왕후가 자기가 묻히기 위해 이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합장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묻혔다. 일설에는 권승 보우(普雨)가 자기 세력을 굳히기 위해 자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근처로 이장하게 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파헤쳐졌다. 1593년(선조 26) 4월 경기감사 성영(成泳)의 치계로 이 소식을 들은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은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홍국(李弘國)을 시켜 그 사실을 조사하게 했다.

왕조국가에서 왕릉이 적에게 파헤쳐졌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수치가 아니었다. 이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원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명나라 군대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자 선조는 부랴부랴 환도를 서둘렀다. 파헤쳐진 능들을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홍국이 가보니 두 능의 재궁(梓宮)은 불타버려 재만 3군데 남아있었고, 부서진 옥주(玉柱), 못 22개 등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중종의 시체는 재궁이 불타기 전에 능 근처 송산(松山)에 옮겨져 있는 것을 광중(壙中)에 다시 묻었다 한다. 그러나 그 시체가 진짜 중종의 시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강섬(姜暹) 심수경(沈壽慶) 등 중종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궁인들에게 봉심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부패가 심해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중종은 말랐는데 시신은 살쪄 보였고, 자색(紫色) 수염이 있었는데, 수염이 없고, 눈 사이에 녹두점이 있었는데 시신에는 없으며, 어깨 왼쪽에 작은 구멍이 두 군데나 있어 진가(眞假)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1593년(선조 26) 7월 21일에 선릉을, 8월 15일에 정릉을 개장(改葬)하고, 10월 15일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일간에 계속 외교문제로 남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일본은 조선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조선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차차 일본과 통신사(通信使)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선·정릉을 파헤친 범인을 먼저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는 궁여지책으로 37세 된 마고사구(麻古沙九) 등을 도굴범으로 잡아 보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자기는 도주(島主) 군관의 노자(奴子)였는데 부산 선소(船所)까지만 갔지 서울에는 간 적도 없다고 했다. 즉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진범이 아닌 것은 확실하나 조·일통교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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