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부실심사 책임론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내분이 깊어지고 있다. 13일 당내에선 “고흥길 전 정책위의장의 사퇴 정도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차제에 당과 정부를 재편해야 한다” 등 지도부를 겨냥한 험악한 말들이 나왔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국회 통과 다음날인 9일까지만 해도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안상수 대표는 이날 “정기국회 내에 예산안을 처리해 대단히 다행스럽다”고 한껏 의미를 부여했고, 김무성 원내대표는 “국민을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주말을 지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여권이 서민복지 예산은 빠뜨리고 실세 예산은 챙겼다’는 야권의 거센 공격이 공감을 얻어가면서 여론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작정하고 예산안을 강행처리 한 것이 당 지도부를 흔드는 ‘부메랑’이 돼 돌아온 셈이다.
당 지도부에서도 파열음이 났다. 13일 오전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홍준표 최고위원은 이번 예산안 파동을 1996년 12월 신한국당의 노동법 기습 처리 사태에 빗댔다. 홍 최고위원은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한 식당에 모여 축배를 들었다”며 “하지만 결국 그것이 김영삼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고, 한보 사태와 국제금융기구(IMF) 사태를 거치며 정권을 넘겨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부 여당을 재편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최고위원의 이 발언을 두고 “안상수 대표 등에 대한 추가 문책을 주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정두언 최고위원도 “민심이 중요하다. 총선과 대선 등 선거라는 큰 틀에서 이번 사안을 봐야 한다”며 홍 최고위원을 거들었다.
비공개 회의에서도 홍 최고위원은 안 대표를 공격했고, “사적 감정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안상수 대표) “반성할 사람이 반성은 하지 않고 해명만 하려 하느냐”(홍 최고위원) 등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오갔다고 회의 참석자들이 전했다.
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이한구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실세 예산을 챙겨준 사람들과 실세들이 책임져야 한다”면서 “고흥길 전 의장을 사퇴시킨 것은 엉뚱한 데 가서 화풀이를 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사태 확산은 안 된다’는 것이 여권 주류와 당 지도부의 분위기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추가 인책 등 파문이 더 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나경원 최고위원도 “여당이 자체 판단에 따라 예산안을 처리한 만큼 스스로 책임지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고흥길 전 의장도 청와대가 자신을 사퇴시킨 것이라는 일부 보도에 대해 “개인적 결단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당 지도부는 파문 확산을 막기 위해 14일에는 당 회의를 갖지 않기로 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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