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한 산의 형상을 그리는 화가 전래식(68ㆍ사진)씨의 작품은 언뜻 보면 세련된 서양화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검지만 투명한 느낌의 먹선이 눈에 들어온다. 분홍, 연두, 파랑 같은 화려한 색채들을 사용했지만, 제각기 튀지 않고 은은하다. 한지에 배접한 광목 천 위에 아크릴 물감과 먹을 섞어 그렸기 때문이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전통 산수화에서 출발했지만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부터 서구의 현대적 조형을 도입해 ‘조형산수(造形山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기운생동과 여백이라는 동양화의 요소, 면 분할 기법과 과감한 색채 등 서양화의 요소가 함께 들어있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동양화를 하는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서양화라고 하고, 또 서양화를 하는 사람들은 동양화라고 해요. 하지만 동양화와 서양화, 구상과 추상 그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국 사람이 그리면 한국화인 거죠. 무엇을 가지고 작업했는가가 아니라 조형 작업을 얼마나 완성도 있게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씨가 1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여는 개인전을 통해 40여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2년 전 부산 동아대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매일 경기 김포시의 작업실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작업에만 매달린 결과물이다. 100호, 200호 등 대작들이 대거 포함됐고, 예전보다 색채감이 한층 화사해졌다. 그는 “요즘 즐겁고 행복한 내 심리가 저절로 그림 속에 나타난 것 같다”며 웃었다. “지루하고 힘들고,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그리는 동안 벌써 다음 작업 구상이 떠올라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1분이 아까워요. 열심히 해야 뭔가 의미있는 작품을 1~2개라도 더 남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를 했다. 장엄하게 펼쳐진 산의 풍경 사이에 보일까 말까 한, 작은 크기의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려넣은 것이다.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대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하찮고 미미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오랫동안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변화를 거듭했지만 그는 산이라는 그림의 대상만큼은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산을 표현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해서 산만 연구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인물이나 꽃으로 영역을 넓힐 수 있겠냐”는 그는 “오늘 그린 산과 내일 그린 산이 달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 아름답지요. 하지만 새롭진 않아요. (내 그림에서) 산은 항상 꿈틀대고,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2)734-0458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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