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9> 장난처럼 시작한 야구해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9> 장난처럼 시작한 야구해설

입력
2010.12.12 05:34
0 0

나는 1975년 김포 양곡종합고에서 서울 환일고로 근무지를 옮겼다. 서울 용문동 집에서 김포까지 매일 출퇴근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몸이 피곤한 것도 문제였지만 좀처럼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더 괴로웠다.

서울 생활은 양곡과는 많이 달랐다. 아이들도 훨씬 더 거칠고 드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질러야 했고 그러다 보니 내 목은 성할 날이 없었다. 생활은 양곡으로 출퇴근할 때보다 오히려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털보로 악명(?)을 떨쳐 가며 점차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운동장에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가는데 오관영 KBS 배구 해설위원이 한마디 툭 던졌다.

“하 선생, 텔레비전에 한 번 나가 보지.” 오관영 선배는 농담의 대가였다. 정말 재미있는 선배다. 나는 당연히 농담으로 여겼다. “오 선생님,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텔레비전에….”

하지만 오 선배는 진지했다. “농담 아니야. 해설자 한 명 추천해 달라는데 하 선생이 제격일 것 같아서. 야구도 했고 입담도 좋으니 해설자로 손색이 없잖아?”

나는 손사래를 쳤다. “물론 야구도 했고, 이야기도 잘하죠. 근데 해설이 구수한 입담만 갖고 되나요?”

그래도 오 선배는 굽히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선수, 지도자, 관중 등 여러 가지 다 해 봤지만 해설은 경험이 없었다. 본부석에 앉아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해설한다는 게 꽤 매력적일 것 같았다.

“생각해 볼게요.” “생각은 무슨. 이미 다 말해놨으니까 같이 가기만 하면 돼.” 그렇게 해서 오 선배의 손에 이끌려간 곳이 동양방송(TBC)이었다. 1979년 6월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김성근 SK 감독 덕분에 해설을 맡게 됐다. 김 감독은 당시 TBC 해설위원이었는데 발음과 일본어가 문제가 됐던 것 같다. 갸쿠텐(역전) 호무랑(홈런) 쇼부(승부) 등은 김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다.

TBC가 제시한 해설자 기준은 참으로 묘했다. ‘싸움 잘하고 동시에 야구방망이를 한 번이라도 잡아 본 사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런 기준을 제시한 사람은 우리나라 스포츠 PD 1호인 김재길씨였다.

한마디로 ‘끼’가 있어야 해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평범한 말투와 사고로는 시청자들을 TV나 라디오 앞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게 김재길씨의 지론이었다.

오관영 선배는 다분히 한량 기질이 있는 내가 그런 기준에 적합하다고 본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마이크를 잡게 됐다. 장난처럼 시작된 이야기가 내 인생의 진로를 바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방송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처음에 나는 중계방송 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라디오 중계였지만 언제 내가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나운서의 이야기가 끝나면 “네, 그렇습니다”라고 장단을 맞추는 정도였다.

긴장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내 해설은 어눌하고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너무 긴장을 하자 경기 시작 직전에 현장 PD가 음료수 병에 소주를 담아줬다. 나는 음료수로 착각하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그날 해설은 내가 마이크를 잡은 뒤 가장 매끄럽고 수준 높았다.

그렇다고 방송 때마다 소주를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해설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방송국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해설이야? 그 정도라면 나도 하지.” “한심한 친구 같으니라고. 당장 집어치우라고 해!” 한동안 나는 이 같은 환청에 시달려야 했다. 참 힘든 시기였다.

‘그만둘까?’ 중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도와준 분들이 많았다. 이장우 박종세 유수호 아나운서였다. 그분들은 중계가 끝나면 나를 그냥 보내지 않고 동대문구장 건너편 식당으로 데려갔다. 소주 한잔 나누면서 그날 중계에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일일이 지적해 줬다.

그분들은 아나운서들이었던 만큼 발음, 목소리 조절 등까지도 상세하게 알려줬다. 때로는 눈물이 핑 돌 만큼 따끔하게 꼬집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산다.

사람들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벤츠’를 타고 방송을 배웠다. 이장우 박종세 유수호 캐스터는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들이었다. 그분들에게 개인지도를 받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나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나는 TBC를 포함해서 KBS에서 27년간 재직했다. 최장기간 ‘전속기록’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옮길 기회가 있었다. 90년대 초반 SBS가 개국했을 때였다. 당시 KBS에서 내 연봉은 3,300만원이었는데 SBS에서 ‘백지 계약서’를 줄 테니 오라고 했다. 방송가에는 내 연봉이 1억원이라고 소문이 났을 때다. 강남의 32평짜리 아파트가 5,000만원 정도였으니 1억원은 엄청난 거鳧潔駭? 그런데 SBS에서 ‘백지 계약서’를 준다는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나는 당장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막상 사직서를 쓰려는데 담당 PD가 눈에 밟혔다. 지금은 국장급이지만 당시에는 차장에서 부장 진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PD였다. 나를 키워준 사람인데, 혹시 내가 옮기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됐다. 나는 결국 KBS에 남기로 했다.

물론 아까운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인 것 같다. 개인적인 의리도 그렇고 내가 처음 해설을 한 곳에서 은퇴(?)한다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