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성이 따르는 노벨상이지만 수상을 거부하거나, 혹은 류샤오보의 경우처럼 타의에 의해 시상식 참여가 이뤄지지 못하는 등 결과적으로 상을 받지 못한 사례가 많다. 평화상을 포함 모든 노벨상 수상자 중 이런 사례는 11건에 달한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가 대표적인 경우. 영 BBC는 “90년 수치 여사가 이끄는 당이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군부의 탄압이 이어져 연금상태에 들어간 그는 상을 받으러 갈 수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수치 여사를 대신해 18살이던 아들이 상을 받았다.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이끈 공로로 8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힌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도 당국의 방해로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지 못해 대신 부인이 상을 수여했다. 73년 당시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베트남 평화협정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레둑토 북베트남 대표는 스스로 상을 포기했다.
류샤오보와 마찬가지로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대리수상마저 못한 케이스는 36년 수상자인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 그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었으며, 나치의 출국금지에 부딪혀 결국 메달 수상의 영예를 맛보지 못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류샤오보처럼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평화상은 아니지만 역시 나치의 방해로 인해 38년 화학상 수상자 리하르트 쿤, 39년 화학상 수상자인 아돌프 부테난트와 생리의학상 수상자 게르하르트 도마크 등도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못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오시에츠키를 비롯한 모든 독일인 노벨상 수상자의 출국을 대놓고 금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2차 대전 이후에는 구 소련이 노벨상 탄압의 선두에 섰다. 의 작가로 유명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정부의 압력으로 수상을 스스로 거부했다. 이와 함께 반체제 물리학자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도 75년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됐으나 시상식 참석이 금지됐다. 그를 대신해 이탈리아 비자를 갖고 있던 부인이 대리 수상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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