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ㆍ864쪽ㆍ3만7,000원
신을 빼놓고는 서양 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 철학자 김용규의 신작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 의 출발점이다. 저자가 서문에 쓴 대로 "313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서양 문명은 곧 기독교 문명이고, 그 심층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는 무엇이며 그 핵심인 신의 본질은 무엇인지 알아야만 현대문명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거기서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본문만 8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 되었다. 서양>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두툼한 책이지만, 읽기에 어렵지는 않다. 부드럽고 정중하게, 독자에게 말을 거는 대화체로 썼다. 질문을 던지고 동의를 구하기도 하면서 편안하게 풀어간다. 이는 사도 바울 같은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성직자들이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할 때 즐겨 쓰던 디아트리베(Diartibe)라는 수사법을 활용한 것으로, 심오한 철학적 변론이나 종교적 사상이라도 일상 용어로 풀어냄으로써 독자나 청중을 대화 상대로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책은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존재'로서의 신, 창조주로서의 신, 인격자로서의 신, 유일자로서의 신을 그것과 관련된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등과 연계해 살펴본다. 기독교 공인 이전 고대 그리스의 신 이야기도 포함해 서양 문명 2,000년을 종주하며 신의 궤적을 따라가는 대장정이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 예술가와 작품, 고전문학의 걸작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우주론과 진화론, 스티븐 호킹,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을 주장하는 오늘의 저명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까지 두루 검토한다.
긴 여정 끝에 저자는 신이 점차 잊혀지는 것이 오늘날 서양 문명을 위기로 몰아넣는 주된 원인이라고 파악한다. 신과 그 이름으로 추구해온 가장 귀한 가치들이 몰락함으로써, 인간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지경을 맞았다는 것이다. 신의 유일성을 다룬 마지막 제 5부는 신의 이름을 앞세워 벌어지는 종교간, 문명간 충돌을 바라보는 저자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신의 유일성은 배타성이 아니고 포괄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상호 연대와 협력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던진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경구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요약한다.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연상케 하는 이 책은 깊이와 향기를 모두 갖추고 있다. 차분하게 읽을 시간만 있다면, 지적 포만감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성찬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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