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자체를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면, 한 국가의 물질적 부와 행복은 상관 관계가 거의 없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불명예스럽게도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뿐만 아니라,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도 늘 아프리카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인은 왜 불행하다고 느끼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인류의 유아기적 질문일지 모르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처럼, 행복에 대해서도 기초부터 돌아보려는 흐름이 이곳 저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행복 전도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송년 모임을 가졌다. 개신교 사역단체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를 이끌면서 가정의 행복을 일깨우는 송길원(53) 목사. 1980년부터 마음수련 프로그램 ‘동사섭(同事攝)’을 창안해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에 ‘행복마을’이란 수련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용타(68) 스님. 10여년 전 강원 평창군에 성 빌립보 생태마을을 설립해 농사를 짓고 아픈 환자를 돌보면서 행복론을 강의하는 황창연(45) 신부가 그들. 승복이나 로만컬러 등 입는 옷은 다르지만, 각자 교회나 사찰이라는 기존 제도적 틀 바깥에서 선교나 포교의 새 영역을 개척해온 이들이 공교롭게도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이 ‘행복 찾기’다.
“행복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이다. 행복해서 감사한 게 아니라 감사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하워드 가드너 박사가 ‘행복한 자는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자는 없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는 게 송 목사의 행복론이다. 주변의 일상부터 사랑할 줄 아는, 긍정의 생각을 가지라는 얘기다.
용타 스님도 다르지 않다. “미래에 뭔가를 성취해야 행복하다는 가치관부터 버려야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이 스트레스를 부른다는 것이다. 용타 스님은 “그 다음 단계는 지금 있는 모든 것도 무상하고 변화하며 자기가 관념 속에서 만든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황 신부도 “스님의 설명은 하이데거의 무의 형이상학을 주제로 한 내 석사논문과 통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황 신부는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삶의 가치기준이 100년 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며 “그때는 자식 낳아 교육시키는 게 전부이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100세까지 사는 긴 인생에 대해 설계하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송 목사는 20여년 전 국내 치유프로그램을 둘러보던 중 용타 스님의 동사섭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직접 체험한 후 만남의 인연을 이어왔다. 송 목사는 “종교계 여성 성직자 모임인 ‘삼소회’처럼 삼색 종교가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천주교에서 황 신부님을 소개받게 됐다”며 “저는 결혼을 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용타 스님과 황 신부님이 가정의 중요성을 잘 설명하셔서 놀랐다”며 웃었다. 송 목사는 “앞으로 이 모임을 꾸준히 가꿔서 한국사회의 행복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대심리학과 불교를 접목하고 있는 밝은사람들연구소도 11일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행복을 주제로 한 학술연찬회를 연다. 불교, 서양철학, 사회학, 심리학의 관점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자리인데, 6개의 발표 논문을 묶은 단행본 (운주사 발행)도 출간했다.
발표 내용 중 흥미로운 대목은 행복 담론이 서양 고대ㆍ중세 철학의 핵심 쟁점으로 활발히 논의됐으나 근대 학문에서는 사실상 추방됐다가 최근 조심스럽게 부활하고 있다는 점. 근대 학문 역시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잊고 지냈던 우리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강상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인간적 행복과 분리되는 방향의 길을 간 것이 철학이 주변화되는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며 “행복은 인간 행위 일반에 중요한 설명력을 갖기 때문에 다시 학문적 탐구 대상으로 갖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19세기에 탄생한 심리학은 정신장애 치료에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인간의 부정적 측면만 다루는 반쪽짜리 학문으로 전락했다”면서 “최근에야 인간의 행복과 긍정적 성품을 탐구하는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심리학자인 셀리그만이 1998년 “진정한 치료는 손상된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최선의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창안한 ‘긍정심리학’이 행복을 탐구하는 심리학계의 새 흐름이다. 긍정심리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떠오른 에드 디너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는 지난 8월 방한해 한국인의 행복 수준이 낮은 것은 물질적인 가치를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경쟁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된 반면, 사회관계의 질은 낮고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권 교수?“그동안 경제발전을 통해 이룬 물질적 풍요를 행복하고 성숙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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