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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7> 가나자와 - 예술은 일상, 시민은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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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7> 가나자와 - 예술은 일상, 시민은 예술가

입력
2010.12.0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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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혼슈 중앙부에 위치한 인구 46만명의 도시 가나자와(金澤)는 ‘작은 교토’로 불린다. 가나자와는 에도 시대 이후 전쟁을 벌이는 대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봉건 영주에 의해 전통 공예와 다도 등 격조높은 문화를 꽃피우며 번성했다. 특히 400여년간 내란이나 지진, 전쟁 등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어 옛 건축물과 거리 등이 잘 보존돼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바람 속에 평범한 지방 도시로 물러났던 가나자와가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창조도시’로 새로운 명성을 얻고 있다. 창조도시는 사사키 마사유키(일본), 찰스 랜드리(영국), 리처드 플로리다(미국) 등의 학자들이 주창한 개념으로, 독자적인 예술문화의 육성과 자유로운 창조 활동을 통해 성장하는 21세기형 도시를 뜻한다. 사사키 마사유키 오사카시립대 교수는 저서 에서 창조도시의 예로 가나자와를 꼽으면서 “내발적 발전이라는 독자적 방식을 통해 문화와 경제가 균형을 이룬 문화적 생산도시로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가나자와를 찾아오는 관광객은 한 해 700만명에 이른다. 가나자와가 한때 잘나가던 역사도시에 머물지 않고 국제적 주목을 받는 문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가나자와의 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즐기는 시민들, 그리고 그런 시민을 중심에 놓은 가나자와 시의 문화정책에서 해답을 찾는다.

가나자와 시민들은 예술에 대한 안목이 높기로 유명하다. 가나자와시 국제교류과의 야치 가오리씨는 “가나자와 사람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예술가’로 여길 만큼 예술활동 참여가 활발하다”고 말했다. 1996년 문을 연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은 창조도시 가나자와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1919년 설립된 방적공장이 1993년 문을 닫자 가나자와시는 이곳을 인수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9만7,000㎡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자리한 공장, 창고들은 음악,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위한 연습과 발표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음향과 조명 등 전문 설비가 갖춰져 있지만, 사용료는 2시간에 300엔(약 4,000원)에 불과하다. 오픈 이래 한 번도 사용료가 오른 적이 없다.

한 해 25만명이 이용하는 시민예술촌의 핵심은 365일 24시간 개방된다는 것. 누구나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곳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동이 트기도 전에 찾아와 색소폰을 부는 회사원, 새벽 1~2시까지 연습을 하는 직장인 밴드 등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24시간 문을 열면 관리가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와타 구미코 촌장은 “시민들이 규칙을 잘 지켜줘서 어려움이 없다. 여름에 야외 공간에서 운동을 하던 노인이 쓰러진 것 정도가 그간 일어난 사고의 전부”라고 답했다. 그는 “다들 이곳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의 집에 낙서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없지 않냐”고 덧붙였다.

또 하나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민 디렉터 제도다. 음악, 미술, 연극 공방 별로 2명씩의 일반인이 디렉터를 맡아 각종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등 운영을 주도한다.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한 장치다. 현재 음악공방의 디렉터는 대학 시절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던 주부다.

지난달 말 시민예술촌을 찾았을 때 이틀 뒤 열릴 공연을 위해 무대 설치에 한창이던 연극 동호회 사람들, 넥타이를 맨 채 홀로 기타 연주에 심취해 있는 중년 남성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연말 공연을 위해 연습 중이라는 아마추어 록밴드의 리더 무라세 신타로(23)씨는 “록음악은 시끄럽기 때문에 연습할 곳을 찾기가 어려운데 여기서는 퇴근 후 밤 12시에도 연주를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시 외곽의 온천 지역에 자리한 ‘창작의 숲’ 역시 가나자와시가 시민들을 위해 운영하는 문화 공간이다. 본래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민가들을 보존해놓은 사립박물관이었던 창작의 숲은 2005년부터 시민들이 판화, 염색, 직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작은 나무 직조 기계 앞에 앉아 부지런히 실을 짜고 있던 스미코마 데이코(67)씨는 “매주 두 번씩 이곳에 나와 염색과 직조 등을 배운다. 가방이나 머플러를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구로사와 신 창작의 숲 소장은 “옛 건축물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 창조적 활동을 하는 것”이라면서 “가나자와 사람들은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에 대한 오랜 전통과 갈망이 있기에 창작의 숲은 자연스레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곳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시민예술촌과 창작의 숲이 과거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곳이라면, 가나자와의 또 다른 명소인 21세기 현대미술관은 세계적 주목을 받는 최신 건축물이다. 올해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지마 가즈요, 니시자?류에의 설계로 2004년 지어졌는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 중심의 건축으로 명성이 높다.

일본 3대 전통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에 인접한 21세기미술관의 콘셉트는 ‘정원처럼 들어가기 쉬운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단층의 투명한 원형 건물로, 정문이 따로 없다.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4곳의 출입구를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120개의 통유리로 이뤄진 외관은 안팎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외부 땅과 미술관 내부 높이에 차이가 없어 계단이 하나도 없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무료존에는 제임스 터렐, 올라푸르 엘리아손 등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데 하나같이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대중적 작품들이다. 또한 가나자와 시민들이 만든 각종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시민갤러리가 미술관 내부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가나자와 사람들의 예술활동 장려를 세계 미술계의 최신 흐름을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시민예술촌의 이와타 촌장은 “가나자와 사람들은 지역의 전통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새로운 예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가나자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나자와=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인터뷰/ 가와라 기요시 가나자와 시 문화교류부장

가와라 기요시(56) 가나자와시 문화교류부장 겸 문화정책과장의 명함에는 직함과 나란히 ‘노(能) 전문 예술가’라는 문구가 찍혀있었다. 일본 전통 가무극인 ‘노’ 중에서도 작은북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는 어떻게 공무원이 예술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니 순서로 따지자면 노가 먼저다. 가나자와에는 나처럼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답했다.

“가나자와 사람들은 최소한 1~2개씩은 예술 활동을 합니다. 도쿄에서 노는 극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전문 분야지만, 가나자와에서는 생활 속에 활성화돼있죠. 다양한 문화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내재돼있는 예술적 수준이 무척 높습니다.”

시민예술촌, 창작의 숲, 우타쓰야마 공예공방 등 가나자와시가 운영하는 각종 문화시설들은 외형상 큰 적자를 내고 있다. 워낙 이용료가 저렴하기에 각 시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투입되는 예산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투자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와라 부장은 “문화는 교육과 마찬가지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라며 “새로운 문화의 창조라는 큰 목표가 있기에 1년의 흑자, 적자로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각 도시마다 개성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가나자와의 얼굴은 바로 문화라는 사실에 시 의회나 시민들 모두 동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나자와는 전통적인 도시경관 보존에도 힘을 쏟고 있다. 1968년 일본 최초로 역사경관 관련 조례를 제정한 곳이 가나자와다. 에도 시대의 게이샤 거리를 정비한 히가시차야 거리, 옛 무사들의 집이 보존된 나가마치 거리 등은 이런 노력의 결과다. 가나자와 시민들은 1980년대 도쿄의 대기업이 가나자와의 전통 거리에 고층 맨션을 지으려고 하자 ‘도시경관 트러스트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가와라 부장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문화는 이어질 수도 발전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가나자와= 김지원기자

■ 유네스코 창의도시 비결은

가나자와는 일본 전체 생산량의 99%를 차지하는 금박공예를 비롯해 지역의 독특한 기모노 염색법인 가가유젠, 칠기, 도자기 등이 고루 발달한 ‘전통 공예의 왕국’이다. 공예 전문 인력 양성소인 우타쓰야마 공예공방은 공예도시 가나자와를 든든히 떠받치는 힘이다.

1989년 개관한 이곳은 도예, 칠예, 염색, 금속공예, 유리공예의 5개 분야에서 31명의 연수생들이 3년간 공부하는 소수 정예 교육기관이다. 35세 이하의 미술 관련 전공자들이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오는데, 이들은 수업료를 내기는커녕 매달 10만엔(약 136만원)의 연구비를 받는다.

일본 전역과 해외에서 온 각 분야의 공예 인재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있기에 아이디어 교환과 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전시 기회도 꾸준히 주어진다. 이곳 출신 작가의 절반은 가나자와에 남아 창작 활동을 한다. 작업 환경이 좋을 뿐 아니라 공예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시민들 덕분에 작품 판매율도 높기 때문이다. 고마쓰 료이치 관장은 “이곳은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혁신의 공간”이라며 “세계적인 공예도시의 이미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젊은 창작 인력 육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나자와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공예 창의도시’가 됐다. 유네스코는 특정 도시가 지닌 고유의 창의성을 개발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취지로 ‘창의도시 네트워크’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문학, 음악, 미디어아트, 미식, 영화, 디자인, 공예의 7개 부문에 세계 27개 도시가 등록돼있다. 한국에서는 올해 서울이 디자인 분야, 이천이 공예 분야의 창의도시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

가나자와=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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