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사방이 어둠이다. 손을 뻗치니 무언가가 머리 위와 양 옆을 가로막고 있다. 공포감에 숨이 거칠어진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켜보니 관 속이다. 기가 차고 비명이 터져나올 상황. 그나마 다행이랄까. 스마트폰 하나가 함께 매장돼 있다. 사내는 아랍어로 설정된 스마트폰을 쥐고선 911 등 전화번호가 떠오르는 대로 미친 듯이 전화를 건다. “구해주세요.”
그러나 전화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담하다. “군인이신가요. 미국인이 맞나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테러범이 전화를 걸어 와 미국 정부로부터 몸값을 받아내라고 윽박지른다. 자신이 떠올린 잘못이라곤 안전하다는 회사 말만 믿고 트럭운전을 위해 이라크에 온 것뿐. 설상가상 관 틈으로 뱀이 들어오는 등 갖은 재난이 이어진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억세게 운 나쁜 이 남자, 폴(라이언 레이놀스)은 과연 생환할 수 있을까.
‘베리드’의 시작은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커다란 벌레로 변해있거나(), 죄를 알지도 못하고 재판을 받은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인물들처럼 ‘베리드’의 주인공은 영문도 모른 채 생매장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지독한 고투를 벌여야 한다.
영화는 시종 관에 갇힌 사내 폴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산소는 희박해지고 스마트폰 배터리는 소진되는 악전의 상황에서 폴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 무책임과도 싸워야 한다. 겨우 통화하게 된 테러담당 요원은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강조하고, 회사의 인사 담당 간부는 회사의 금전적 손실을 우려한다.
관 속에서 펼쳐진 일인극이 95분 동안 이어진다. 생매장된 사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배우 단 한 명으로 스크린에 구현했다. 단편영화에서나 쓸만한 내용이나 촬영방식 아니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영화는 관객의 심장을 움켜쥔다. 폴의 숨이 거칠어질 때 관객의 숨도 턱 막히는 듯한 감정이입이 이뤄진다. 폴의 1시간 넘는 고군분투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 덕분이다. 너무 짜맞춘듯한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이야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연 2m 땅 속에서도 국제전화가 그리 잘 될까 등)이 전개되지만 독특한 스릴러물로 즐기기 나쁘지 않다.
이 영화의 미덕은 무엇보다 전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다. 사선에 선 폴은 절규한다. “나는 그저 평범한 트럭운전사다. 돈을 벌기 위해 이라크에 온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전쟁 등 사회 이슈에 둔감하고 무관심했던 그는 끔찍한 테러를 당하고서야 이라크전의 참상을 체감한다. 영화는 그렇게 시민들이 사회현실에 눈감았을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지를 은유해낸다.
7개의 특수 관을 동원해 17일간 촬영했다. 300만 달러를 들여 전세계에서 1,7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스페인 출신의 신예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 8일 개봉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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