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한 때, 나는 사랑을 하려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에 나오는 주인공 시드니 커튼처럼 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또 그렇게 하리라 맹세하고 살았다. 디킨스는 최근 들어 세익스피어보다 오히려 위대한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학계에 재조명되고 있다. 소설은 광란의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자 루시 마네트를 위하여 주인공이 자진하여 단두대에 서는 절정의 순애보이다. 두>
서울과 베이징이 다른 점
디킨스는 이 작품 집필 당시, 흠모하던 여성 엘렌 터넌에 대한 자신의 절절한 애정을 소설을 통해 표현했다고 한다. 살아오며 나 스스로 그러한 사랑을 했는지 자신도 없고 기억도 아득하지만, 난 여전히 <두 도시 이야기> 야 말로 사랑의 결정판이라고 믿는 철부지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 학기 수강생들에게 사랑에 빠지기에 앞서 반드시 <두 도시 이야기> 를 읽어 보라고 강권하기도 한다. 두> 두>
그제 월스트리트 저널은 디킨스의 동명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아시아판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asian cities)> 라는 기사를 통해 서울을 소개했다. 디킨스 소설에 등장하는 두 도시는 혁명의 시대 런던과 파리이지만 WSJ 기사는 베이징과 서울이 주인공이다. 아시아판>
WSJ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지 알려면 서울과 베이징을 보면 된다고 주장한다. 두 도시의 문화가 유교에 기반을 두었고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정치 때문에 그 전개과정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울은 민주정치가 꽃피는 반면 중국의 도시들은 공산당의 독재와 부패한 통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2년 전 중국 정부가 올림픽을 이유로 (집권층이) 일방적으로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불러 들였지만, 이들 건축물은 세계 어디에 두어도 되는 건물들로 중국의 문화나 전통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등 베이징 전반에 걸쳐 혹평한다. 당시 네덜란드인 렘 쿨하스는 관영 중앙방송 CCTV의 신사옥을, 스위스 건축사무소 헤르초크&드뫼롱은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바 있다.
WSJ는 서울을 베이징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으로 평가한다. 서울 역시 옛 왕조의 수도였고 또 과거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베이징과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 서울의 왕궁과 궁궐 정원들은 한국전쟁 속에서도 운 좋게 살아 남았으며,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 양식으로 지은 시청조차 논쟁 끝에 그대로 남아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30년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인들은 오늘날 세계최고 수준의 민주국가로 변신해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자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늘어난 광장 공원 쇼핑공간 산책로 등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상파울루나 자카르타 시민들이 현대차를 몰고 삼성 스마트폰을 통해 뉴스를 확인하며 한국 기업이 지은 이파트로 퇴근하는 상상을 하고 있고, 이는 민주화된 한국인들의 자부심이라는 것이 WSJ의 진단이다.
뒤죽박죽 민주주의 매력
물론 WSJ 기사를 우리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하지만 삼청동 청담동 거리는 파리의 샹제리제나 뉴욕 맨해튼에 크게 뒤지지 않으며 도시의 경쟁력 또한 더 이상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다. 과거 국가경쟁력은 주로 해당 국가의 공산품 품질로 비교되었지만 세계화의 진전으로 오늘날 국가경쟁력은 도시 경쟁력과 일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도시가 가진 경제적 인프라는 물론 정치적 인프라 또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서울은 동북아시아의 매력 있는 도시로 점차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비록 서울시와 시의회가 박 터지게 싸우고, 오세훈 시장이 시정을 거부하는 등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WSJ의 지적처럼 그래도 서울을 서울답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이 땅이 구가하고 있는 <뒤죽박죽 민주주의> 가 아닐까. 뒤죽박죽>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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