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간지 기자로 40년 이상을 근무하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기록했으며, 국내는 물론 외국의 사진 콘테스트에서도 많은 상을 수상했다. 또한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전국의 굿판과 국악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의 춤’을 정리하고 출간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복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본디 사진에 예술이라는 말을 쓰기를 꺼린다. 내가 일생을 통해 추구해 온 사진세계는 사진으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난 반 백 년 동안 거짓과 꾸밈없이 대상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리얼리티야말로 사진의 본질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발로 뛰는 현장이야말로 최고의 작업실이자 스승이라 믿는다.
연재를 시작하며 신문사 시절의 취재 뒷얘기를 언급했으니 이제 사진을 시작한 먼 과거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나는 1926년 9월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도 91번지에서 보통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 정창모와 어머니 김온수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수청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지지리도 공부를 못한 탓에 당시 평안북도에서는 내가 진학할 만한 중학교가 없었다. 평양중, 오산중, 광성중학교 등은 당시 수재들만 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실업학교라도 보낼 요량으로 당시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던 외삼촌에게 나를 보냈고, 외삼촌의 도움으로 오사카 상선(商船)중학교와 상선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상선전문학교 재학 중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모든 배들을 해군에서 징발함에 따라 해군 군속이 되어 군 수송선을 타며 중국 다롄과 톈진, 사이판과 수마트라 등지를 떠돌았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발악을 했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해방 후 군속 생활을 마친 나는 외삼촌 집으로 돌아왔지만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하신 외삼촌의 집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1946년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며 외삼촌이 쓰던 일제 카메라 ‘웰미’를 선물 받았다. 처음 갖게 된 카메라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필름도 없는 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필름을 처음 구입한 건 그 이듬해. 1947년 4월 창경원을 찾아 첫 셔터를 눌렀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관에 달려가 현상을 부탁했지만 이럴 수가! 현상되어 나온 필름에는 상(像)이 하나도 맺혀있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나는 내가 잘못 찍은 게 아니고 사진관에서 실수한 것이라 생각했다. 두 번 째 찍은 필름을 들고 다시 사진관을 찾아가 암실 기사와 함께 작업실로 들어가 감시를 해보려 했더니 암실은 말 그대로 빛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현상 결과 다섯 장 정도가 상이 맺혔고 나머지는 또 맺히지 않았지만 화가 나기보다는 야릇한 호기심과 재미가 생겼다. ‘이것 봐라, 이거 참 신기하네. 다음에는 반드시 멋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이겠다!’ 실수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점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필름의 상이 인화지에 그대로 맺히는 밀착 사진은 나를 더욱 매료시켰으며 돈이 생기기만 하면 필름을 구입하는 데 다 써버리곤 했다.
싼 필름을 구입하기 위해 부평 미군부대를 배회하며 나름대로 사진에 대한 가치와 주관을 갖게 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5일 밤 부산으로 피난을 가며 제일 먼저 보따리에 깊숙이 넣은 것이 카메라였다. 부산 초량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작은 사업을 하는 이모네 일을 도우면서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필름을 구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남부민동에 있던 ‘미미사진관’이다. 다행히 촬영기사로 있던 강기원(姜基遠)과 친하게 되어 필름 현상 정도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부산에 거주하며 주로 송도해수욕장을 찾아 바다를 즐겨 찍었고 주변의 경관과 식물들, 특히 접시꽃을 많이 찍었던 기억이 난다. 이 때가 가장 설레는 마음으로 많은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이렇게 혼자 사진을 찍으러 다니며 사진에 점점 빠져들어가던 중, 공병대 문관으로 근무하며 일본산 군수물자인 군 트럭과 지프를 인수하기 위해 부산에 온 이종사촌 형 선영의(宣永儀)를 만났다. 형은 카메라와 사진에 빠져있던 나에게 자기 부대의 군속으로 사진 담당을 해보라고 권했고 ‘옳다구나!’생각한 나는 주저할 겨를도 없이 사촌 형을 따라 경상북도 영천 부근의 화양이란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카메라는 내가 해방과 6.25를 거치며 격동기를 살아가는 수단이었다. 전쟁통에도 카메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기록사진을 찍는 문관이라는 직업은 카메라에 더욱 익숙하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부산까지 후퇴하자 다시 미미사진관의 강기사를 만나 우정을 다지던 차에 처음으로 캐논 F1.9를 구입하게 됐다. 이 때가 1953년이다.
이후 민병대 총사령부 문관으로 근무하며 사진일을 전담했고 1955년에는 법무부 사회보호협회 사업부에서 잠깐 일하면서는 직영업소인 음식점 ‘남강(南江)’에서 지배인을 하며 모은 돈으로 꿈에 그리던 ‘라이카’카메라도 한 대 구입할 수 있었다.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한 자유백화점 카메라부의 이찬우(李天雨)선생과 단골로 거래하며 친분을 쌓던 중 이선생이 나에게 사진연구회 가입을 권유하였고 사진예술가로서 첫 신고를 하게 된 것이 1955년 4월 ‘한국미협전’ 사진부문에 출품한 ‘고물상노인’이 입선하고부터이다. 마포 공덕동에서 찍어 입상한 이 사진은 내가 국내에서 출품하여 상을 받은 유일한 사진으로 당시 서울대에 기증하였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본래 국내 사진 콘테스트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먼 곳을 응시하는 노인의 표정과 주렁주렁 걸린 자물쇠와 군인들의 혁대, 수통, 탄띠 등 내가 찍었던 당시 모든 사진들은 전쟁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전쟁과 인간, 그것은 이후에도 나의 사진 작업의 주제로 작용해 왔다.
1956년 이형록, 손규문, 조규, 이안순선생을 정회원으로 모신 사진연구회 신선회(新線會)가 창립되었고 연구회원으로 가입한 나는 이해문, 한영수, 안종칠, 조용훈 등 17명과 함께 한국 사단(寫壇)에서는 처음으로 리얼리즘사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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