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쟁을 벌이는 건 우리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죠. 누가 더 큰 고추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만약 제가 작은 고추를 가진 남자라면, 저는 제 것이 작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말로 거대한 빌딩을 짓거나,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치거나, 아니면 아주 긴 책을 쓰려고 할 거예요. 맞지요?" 데이비드 헨리 황의 희곡 (이희원 옮김, 동인)에 나오는 한 여성의 대사다. '아주 긴 책'을 한 권 낸 나로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라를 정복하건 혹은 다른 무슨 일을 하건, 옷을 입고 있는 한, 누구 것이 더 크고 더 작은 지를 확실하게 증명할 길이 없단 말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화 된 사회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핀 정도 크기의 작은 고추를 가진 무수한 남자들이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요." 언젠가는 이 재치 있고 통렬한 문장을 인용할 날이 오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상황이 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고한 목숨들이 희생된 이 슬픔의 시절에 적절한 문장도 아니다.
분노는 당연하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분노만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듯이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 국방장관은 북한을 철저히 응징하지 못하고 물러나 아쉽다고 했고, 현 국방장관은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 끝까지 응징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가장 절실히 필요한 말일까. 오히려 전자는 북한의 도발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머리 숙여야 하고, 후자는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어떤 일이 있어도 막겠다고 결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과하거나 안심시켜주는 이들은 없고 화를 내는 사람들뿐이다. 외교 담당자, 국방 책임자, 국회의원 중 많은 수가 북을 비난하고 아랫사람을 질타하고 복수를 외친다. 평소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우던 이가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는 제 가족의 목숨조차 지켜내지 못했으면서 오히려 다른 가족구성원들보다 더 화를 내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상황이 응전과 확전으로 이어지면 결국 희생되는 이들은 탁자에서 소리만 지르고 뒤늦게 현장 순시나 하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또 힘없는 아내와 자식들일 뿐이지 않은가.
민간인 거주 지역에 폭격을 가한 북한의 어처구니없는 만행에 대해서는 어떠한 분노로도 울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에게 가부장의 단호함과는 또 다른 역할도 더불어 기대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머니들이라면 먼저 제 자신을 탓하고 다친 자식의 곁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피란민들이 눈물과 한숨의 시간을 보낸 찜질방에서 그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사과하고 위로한 정치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최소한 한두 명쯤은 그래도 되지 않았을까.
제 자식이 죽고 난 뒤 영웅으로 대접할 일이 아니라 애초에 죽지 않도록 지켜줬어야 했다. 응전의 대상이 될 북한의 병사들도 무슨 추상적인 목표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점을 잊는 일은 다른 불행의 시작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부장이면 좋겠다. 강력한 대응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응전과 확전을 부르짖는 방식이 아니라 더 이상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면 싶다. 가부장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평화가 곧 승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