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전문 인터넷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주도하고 있는 미국 비밀 외교전문 폭로가 전세계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세계를 소란스럽게 한 정도로 보면 위키리크스가 사전 예고한 25만여건 이상의 미 외교전문에 대해서 무차별적 폭로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유출된 외교전문 전체를 위키리크스로부터 일단 넘겨 받은 서방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무엇을, 또 어떻게 공개할 지에 대해 독자적 편집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키리크스와의 사전 협의를 거쳐 보도를 전제로 문제의 외교전문을 공유하게 된 언론은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독일 슈피겔, 스페인 엘파이스 등 5개 매체다. 뉴욕타임스의 경우, 지난달 28일 공개를 시작하기 앞서 미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거나 미국의 비밀 정보원을 위험에 빠뜨리는 내용 등은 폭로 대상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의 편집방침과 그에 따라 외교전문 가운데 취사 선택된 것들은 보도 이전에 나머지 4개 언론과 위키리크스 측, 그리고 미 행정부 관련 당국에도 보내진다. 뉴욕타임스는 4개 언론과 위키리크스 측이 자신들의 편집방향을 반영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한다. 또 미 당국에 대해선 일종의 '국가 의견'을 요청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국가안보 사항 등에 대한 미 정부의 의견 제시가 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묵살되기도 한다"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설명이다. 이렇게 다소 복잡하게 3각, 4각으로 '조율된' 상호작용 속에서 뉴욕타임스는 자신들의 경우, 25만여건 가운데 실제론 100건 정도만 공개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바뀔지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위키리크스 측도 매일 수십~백여건씩의 외교전문을 새로 폭로하는 수준에서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비밀 외교전문이 제공된 5개 매체가 속한 다섯 나라의 경우는, 최소한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가 존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속수무책인 것은 우리를 포함,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처지이다. 5개 매체가 여타 국가들의 사정까지 감안해서 폭로할 외교전문들을 선별해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위기에 처하면 보복폭로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는 위키리크스 측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우리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활동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위축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외국 언론이 던져놓은 '보도의 가치', '알 권리'에 대한 판단에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보면서도 뒷맛이 상당히 개운치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외교전문은 미 외교관이 그들의 시각에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폭로된 내용만으로 우리 외교관을 섣불리 비판하는 것도 그리 마땅한 일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또 한가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전세계 외교관 활동의 기본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현대에는 외교관하면 모두 '신사'와 '숙녀'의 품위를 연상하게 되지만 1,2세기 전만 해도 외교관들에게는 "조국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해외에 보내지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고, 또 외교관들은 주재국 정부로부터 항상 "허가된 스파이"로 여겨지곤 했다. 위키리크스 등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미 외교관들이 과연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활동했는가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런데 과연 그들만 그럴지는 정말 장담하기 어렵다.
고태성 국제부장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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