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중 조선(造船)대전의 싸움터가 금융 쪽으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 중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해외 선사에게 자금까지 지원하며 선박을 수주하는 전략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제조 경쟁력이 아닌 금융 및 자금력 때문에 세계 조선업 정상의 자리를 중국에 내 줘야 할 판이다.
통상 선주(船主)가 조선업체에 선박 제조를 의뢰할 때에는 건조자금 상당액을 미리 조달해야 한다. 대형 선박을 한 척 만드는 데엔 2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장기 자금 마련 계획 등이 확보돼야 안정적인 건조가 가능한 것. 특히 선박건조 자금은 수조원에 달하는 거액인 경우가 많아 선주가 자체 자금으로 이를 모두 충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선박 제조 과정에서 선박금융의 역할이 절대적인 이유다.
앞서나간 곳은 역시 중국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2월 '조선공업 조정 및 진흥계획'을 발표하고, 중국은행, 중국수출신용보험공사, 중국수출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을 총동원, 선박금융을 지원하고 나섰다. 외국 선주들이 중국조선소에 선박 제조를 발주할 경우 선박 가격의 80%까지 지원하는 것이 골자이다. 특히 민생은행과 공상은행은 선박금융전문 리스회사를 설립, 스스로 선박을 발주한 뒤 해운사에 임대하는 형식의 선박금융업까지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펀드도 등장했다. 지난해 12월 톈진에서 등록한 중국 최초의 조선산업 투자펀드는 200억 위안 규모로,'자국선박에 의한 자국화물 운송 실현'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또 최근 상하이에서는 중국 최초의 사모펀드인 50억 위안 규모의 해운산업펀드까지 조성됐다.
정부 고위층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10월 그리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리스 선주들을 위한 50억달러의 선박펀드 조성을 약속했다. 그리스는 세계 1위의 해운국이지만 경제위기로 인해 신규 선박 발주 자금이 말라버린 상태. 원 총리의 약속 직후 그리스의 카디프 마린은 중국 후동중화조선에 컨테이너선 4척을 발주했다. 중국의 전략이 먹혀 든 셈이다.
중국수출입은행도 최근 이탈리아 선주협회와 이탈리아 선주가 중국 조선소에 건조하는 선박에 대해 자금을 지원키로 합의했다. 또 세계 최대 철광석업체인 브라질 발레사가 초대형 운반선(VLOC) 12척을 발주했을 때도 선가의 80%인 12억3,000만 달러의 선박금융을 지원한 바 있다.
세계 조선업 1위를 중국에 위협받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못한 민간 기업들이 먼저 팔을 걷어 붙였다. 해운업체들의 모임인 한국선주협회는 3월 부산시와 선박금융전문기관 설립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장기적으로 부산에'선박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동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사는 10월 '선박금융전문기관 설립과 관련한 타당성 용역'중간보고회에서 공공금융기관 형태로 선박금융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대출보증기관인 선박보증기금을 먼저 설립하거나 이미 운용되고 있는 선박투자회사(펀드) 제도에 여신 기능을 추가해 선박캐피탈을 설립한 뒤 순차적으로 선박금융공사, 선박은행 등의 형태로 키워나가자는 복안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정부와 금융권의 자금 지원 없이는 중국과 경쟁을 하기 어렵다"며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하루 빨리 제대로 된 선박금융기관을 설립해 조선업계를 후방에서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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