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수들 모두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성과가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엄청난 선물을 주셨네요. 그동안 많은 성원을 보내 주신 바둑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을 석권하고 돌아온 양재호 바둑대표팀 감독에게 요즘 '복장(福將)'이란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금메달 싹쓸이'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개선장군 양 감독을 지난 2일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_개선을 축하합니다. 금메달 세 개를 예상하셨습니까?
"생각은 했죠. 하나도 못 딸 경우에서부터 한 개, 두 개, 세 개까지 여러 가지 상황이 계속 머리에서 뱅뱅 맴돌았으니까요. 바둑이 이런 경우가 없었잖아요. 그동안은 개인종목 성격이 강해서 잘하거나 못해도 모두 본인 책임이었으니까. 그런데 온 국민이 주시하는 상황을 처음 맞으니까 부담이 엄청나더라구요."
_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금메달을 하나도 못 땄다면 어땠을까요.
"전적으로 감독이 책임을 져야죠. 사실 별 생각을 다 했어요. 한국기원 이사직은 당연히 그만 둬야 하고 방송 출연도 접어야겠다, 집에 쳐박혀서 나오지 말까, 아니면 어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까 등등 아무튼 바둑동네서 제 얼굴 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_가장 기뻤던 순간은?
"그야 물론 혼성페어전에서 박정환-이슬아가 금메달 땄을 때지요. 순간 '이제 면피는 했구나'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웃음). 저뿐 아니라 선수단 모두 그때부터 기운이 불끈 솟아서 남녀단체전까지 우승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혼성페어가 가장 취약종목이었는데 여기서 우승했으니 한 번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죠."
_혼성페어전은 원래 바둑에선 졌지만 중국이 벌점을 받는 바람에 이겼지 않습니까. 당시 국내서는 벌점 받은 걸 몰라서 혼선을 빚었는데 당시 현장에선 알고 있었나요.
"우리도 몰랐어요. 바둑이 시작되면 대회장에 선수 외에는 일절 출입금지에요. 감독이나 코치도 못 들어가요. 그러니 현장 상황이 어떤지 알 수가 없지요. 모니터를 통해 대국진행을 지켜봤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졌어요. '혹시나 중국이 벌점을 먹었으면 이기는데'하고 기대는 했죠. 오죽하면 바둑이 끝날 즈음 화장실에 가면서 속으로 '화장실에 다녀 오는 동안 기적이 일어나서 승리의 환호가 터진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까지 했겠어요. 결국 계가까지 끝나고 모두들 침통해 있는데 잠시 후 정말 기적처럼 우리가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지요. 얼마나 기쁘던지. "
_선수들 이야기 좀 해볼까요? 이번 대회 최고 수훈선수를 꼽는다면.
"제가 감독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이번에는 모두가 최고 수훈선수라고 할 만큼 잘해줬습니다. 박정환 조한승이 전승을 거뒀고 강동윤 최철한도 소리 없이 제 역할을 다했어요, 여자선수들도 잘 했고. 이창호 이민진 등 큰 대회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 선수단을 잘 이끌어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_단체전에서는 한중 양국의 오더 싸움이 대단했다던데요.
"저와 김승준 윤성현 코치는 이번 대회 단체전 승부의 관건은 오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진작부터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한국과 중국으로 편을 갈라서 서로 최선의 오더를 찾기 위해 수십 차례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결과적으로 남녀단체전 모두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됐습니다."
_국내서는 이창호가 부진해서 결승전에 빠질 거라는 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어요. 이 9단이 국내서도 많이 쉬었고 현지에 와서도 컨디션이 썩 좋진 않았죠. 그러나 본인이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힌데다 워낙 책임감이 강해서 코칭스탭들도 이 9단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요.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구리를 잡았으니까 우리 예측이 맞은 셈이지요."
_이세돌은 어땠습니까? 콩지에에게 두 번 다 졌는데. 국내에서는 열심히 둔 게 아니지 않느냐는 의혹 어린 시선도 있었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콩지에에게 지고 얼마나 괴로워했는데요. 아마 심적으로 타격이 컸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선수에게 졌다면 모르지만 중국팀 에이스에게 졌기 때문에 전략적 측면에서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에요. 평소 까칠하다는 평판과 달리 대회기간 중 동료들과도 잘 어울려서 저도 이번에 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이민진이 루이와 대국하기 전날에는 밤늦게까지 같이 기보 검토도 해줬어요. 아마 대회기간 중 여자기사들 바둑을 제일 많이 봐준 사람이 이세돌일 거에요. "
_박정환이나 조한승은 병역문제가 걸려 있어서 더욱 각오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결과적으로 박정환이 7전 전승, 조한승이 6전 전승을 했으니 그런 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두 선수는 이번에 큰 고민거리 하나를 덜었으니까 앞으로 더 큰 활약이 기대됩니다. 실제로 박정환이 페어에서 금메달을 확정 지은 후 다음날 단체전에서부터 당장 바둑 내용이 좋아졌어요."
_참, 이번에 이슬아를 비롯해 이창호 이세돌이 침을 꽂고 대국을 벌여 화제를 모았는데요. 그거 규정 위반은 아닌지, 또 효과는 있었습니까?
"규정상 문제는 없었어요. 대회본부에서도 별 말이 없었고. 중국선수들이 자주 바르는 호랑이연고처럼 침술은 규정위반이 아니랍니다.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심리적 안정효과는 있었겠지요. 사실 결승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나란히 머리에 침을 꽂고 나간 건 중국선수들에게 '한국선수들이 저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려는 심리전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_중국이 예선과 결승에서 잇달아 한국에 1대4로 패한 건 좀 의외인데요.
"혼성페어전 결과가 한국과 중국에 정반대의 작용을 했다고 봅니다. 한국선수들은 한껏 기세가 오른 데 반해 중국선수들은 나머지 경기서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굳어 있는 걸 느꼈거든요. "
_중국은 개최국인데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그럼요. 실은 우리보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애당초 이번 대회에 바둑을 넣은 것도 자기네가 분명히 금메달을 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테니 당연히 그렇겠죠. 경기가 끝나고 나서 제가 중국기원 류스밍 원장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눈물이 글썽하더라구요. 듣기로는 성적 부진에 따른 문책인사도 있을지 모른다니 중국이 이번 대회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_광저우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둑계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바둑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너무 안타깝죠. 사실 저희들은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당연히 정식종목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더 열심히 한 건데…. 최종 결정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한국기원이나 대한바둑협회가 좀더 힘을 내서 바둑이 인천 아시안게임에도 정식종목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박영철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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