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지음
창비 발행ㆍ264쪽ㆍ1만원
소설가 김사과(26ㆍ사진)씨가 등단 5년 만에 내는 첫 소설집이다. 김씨는 스물한 살에 등단, 장편소설 <미나> (2008), <풀이 눕는다> (2009)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반사회적 충동에 휘둘리는 인물들의 일탈을 도발과 파격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문제적 작가. 등단작 '영이', 올해 한국일보문학상 본심 진출작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등 <영이> 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역시 저마다 격렬한 파괴 본능에 사로잡힌 인물이 등장해 이 젊은 작가의 문학적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이> 풀이> 미나>
표제작의 주인공인 소녀 영이는 술과 폭력으로 점철된 부모의 불화에 늘 시달린다. 영이의 불안과 고통은 분열증으로 나타난다. "영이는 영이의 영이만 없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이가 집으로 가는 길이면 영이의 영이는 어김없이 영이의 귓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9쪽) 이 독특한 형식의 가족 서사는 아빠는 술을 마시고, 엄마는 아빠에게 욕을 하고, 그런 엄마에게 아빠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일상을 반복적으로 겪는 소녀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신경증적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24쪽)
수록작 '과학자'의 주인공의 정신 상태 역시 영이 못지않게 비정상적이다. 그녀는 고추장 중독자다. "어젯밤 드디어 고추장이 신경시스템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냈다"(36쪽)는 주인공의 엉터리 장광설로 시작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인공의 언행을 펼쳐보이던 소설은 주인공이 동성 애인인 한나를 무참히 살해한 뒤 그로테스크한 제의(祭儀)를 치르는 것으로 끝맺는다. "난 한나의 몸을 반듯하게 펴고 허벅지 위에 앉아 통에 든 고추장을 한나의 몸에 펴바르기 시작했다… 한나는 붉은 찰흙으로 빚은 인형 같았다. 으악. 소리지르며 난 한나를 껴안았다."(63쪽)
도움을 청하는 할머니를 살해한 뒤 할머니의 환영을 상대로 자기 변명과 고민을 털어놓는 여대생('이나의 좁고 긴 방'), 자신을 모욕하고 체벌한 교사를 집요하게 저주하며 성적으로 방종하는 고등학교 자퇴생('준희'), 죽은 애인을 단짝 여자친구와 함께 불태우는 여성('나와 b') 등 작가 김씨가 창조한 '정념의 화신'들은 어느날 불쑥 살의에 사로잡혀 무고한 사람들을 잇따라 살해하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의 회사원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독자를 당혹하게 만들면서 파국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이들을 통해 작가는 인간 실존의 어떤 양상을 생생하게 부각시키는 한편, 인간을 옥죄면서 그 본성을 박탈하는 현대사회의 비정함을 새삼 환기시킨다. 예컨대 자기가 죽인 할머니의 환영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거는 여대생의 모습이 모노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나의 좁고 긴 방'에서 그녀는 이렇게 자포자기의 심정을 드러낸다. "(엄마는) 이따위 것들을 공부하면 만원짜리가 몇개나 솟아날까, 하는 눈빛으로 내 책장에 꽂힌 전공서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죠.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처럼 나를 잡아먹을 날만 기다리며 포동포동하게 살찌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젠 뭐 다 틀렸지. 할머니를 죽이고 말았으니까요."(83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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