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조사 직원 36명 모두 환갑 넘겨… 나이 많아도 일 잘할 수 있다"
교사·CEO·은행지점장 등 출신 다양고령자기업 지정돼 사무실 지원 받아
최근 정치 여론조사 활발해지자설문에 응해주는 사람 많아져
하루 2만보… 건강 챙기고 용돈 벌어젊은이와 대화해 삶의 활기도 생겨
"환갑 넘었어도 일 잘 할 수 있어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말쑥한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얼굴에는 하나, 둘 주름이 있지만 넥타이 매고 정장을 갖춰 입어 멋쟁이 젊은이 못지 않게 깔끔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보아온 편한 할아버지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일에 매진하는 노련한 직장인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차려 입지 않으면 일 하기가 어려워요."
최혜송(72)씨의 말이다. 그는 이곳 탑리서치의 회장이다. 서울 도심 종로구 경운동의 커다란 오피스 건물에 자리한 탑리서치는 만 60세 이상의 직원들로만 구성된 설문조사 기관이다. 전문 리서치 기관으로부터 설문지를 받아 현장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일일이 면접조사를 하는 것이다. 직원 모두가 환갑을 넘은 설문조사 기관은 한국에서 이곳이 유일하고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를 쉽게 찾기 어렵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서울시 고령자기업으로 지정돼 작지만 아늑한 사무실을 지원받았다.
만 60세 이상 직원들로 구성
최혜송씨는 대전의 한 오피스텔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하다 2003년 65세의 나이로 퇴직했다. 나이로 볼 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건강이 괜찮았고 일에 대한 미련도 컸다.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이 일 한번 해봐라"며 권한 것이 면접조사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첫 면접조사가 '전국산업체 작업환경실태 일제조사'였다. 노동부가 발주한 이 조사는 중소기업이 공장에서 어떤 기계를 사용하는지 알아보는 것인데 공군 정비 장교 출신으로 기계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상 기업의 명단을 받아 시화공단에 있는 공장들을 찾아 다니며 조사를 했더니 한 건당 8,000원이 떨어졌다.
최 회장에게 설문지를 건네준 전문 리서치 회사에는 그와 같은 연령대의 면접조사원들이 제법 많았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힌 뒤 별도의 공간과 전화를 받고 월 1만원씩 걷어 함께 저녁을 먹는 등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고령자 일자리 사업으로 면접조사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 15명이 합류했는데 이들이 바로 창립멤버다.
그렇게 해서 2007년 2월 탑리서치가 발족했다. 이 이름은 최고(top)보다는 탑골공원과 관계가 있다. 사무실과 가까운 탑골공원에는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데 서울노인복지센터가 노인을 위한 일을 하겠다며 이름을 붙였다.
탑리서치의 직원은 현재 36명. 창립멤버 말고는 모두 공채로 뽑았다. 73세가 가장 연장자인데 교사, 기업체 CEO, 은행지점장, 기업체 임원 등 출신이 다양하다. 여성도 일곱 명이다.
한국리서치, 한국갤럽, 현대리서치, 동서리서치 등 20여 전문 리서치 기관으로부터 일감을 받아 현장에서 면접조사를 하는데 그 동안 산업자원부, 산림청, 조달청, 한국노동연구원,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서울시여성능력개발원 등의 의뢰를 받아 사업 만족도와 사업 수요 등을 조사했으며 학위 논문 작성에 필요한 조사도 일부 진행했다.
조사원들이 받아온 설문지는 내부적으로 다시 한번 검토해 정확성을 높인다. 최 회장은 "환갑 넘은 사람들도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한다. '정확한 조사가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라고 쓴 큰 글씨를 사무실에 붙인 것은 그런 뜻에서다.
나이, 권위 내세우지 않아
설문지를 들고 사무실 등을 찾아가 하는 면접조사가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상대를 잘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혜송 회장만해도 처음 일을 할 때 "나이 많다고 권위 내세우면 안되며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머리 희끗한 어른을 대놓고 피하지는 않는다. 최근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의 과정에서 여론조사와 출구조사가 활발해지고 그것이 유권자의 흥미를 돋우는 것의 영향을 받았는지 설문조사에 잘 응해주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깍듯하게 인사하고 차 대접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직위가 높은 설문 대상자일수록 더 그렇다. "건강하시라,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CEO도 있었다.
그렇지만 귀찮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 그들을 대하면서 어느덧 몇 가지 요령을 익혔다. 우선 월요일 오전에는 절대로 찾아가지 않는다. 대개는 회의 등으로 바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들르면 만나기도 어렵고 성의 있는 응답도 기대하기 힘들다. 하루 중에는 요일에 관계 없이 점심 시간 직후가 가장 좋다. 배불리 먹고 나면 좀 느슨해지고 정신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설문 조사에도 잘 응해준다.
젊은 사람을 대하는 요령도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인사를 깍듯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그러지 마시라고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거기에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주면 황송해 한다.
"지금 무척 바쁜데, 이것 꼭 해야 합니까"하며 딱딱하게 나오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럴 때 쓰는 말이 "좀 도와주세요"다.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 그렇게 말하면, 못하겠다며 매정하게 나오는 사람은 크게 줄어든다. 그래도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나라 정책 수립하고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그래도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오라면서 일단 미루고 보는 유형이다. 자신의 생각과 자기 기업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정색하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한번은 어느 기업에 갔더니 이사가 설문지에 회사의 규모와 매출 등의 지표를 적도록 돼 있는 것을 보고는 응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사전 통화할 때는 좋다고 해놓고 찾아갔더니 거절한 것이다. 기분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이들은 항상 일소오다(一小五多) 건강법을 강조한다. 음식을 적게 먹는 것이 일소라면, 사람과 많이 접하고 많이 배설하며 많이 움직이고 많이 쉬고 많이 잊는 것이 오다이다. 좋지 않은 기억은 다 잊으려고 한다.
사회적 기업 지정 통해 도약 기대
이렇게 해서 올해 8월까지 1억4,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건당 8,000원 정도를 받는 조사원의 수입은 월 평균 80만~100만원. 조사원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아주 궁핍한 것은 아니어서 이 수입을 기초생활비에 쓰기 보다는 용돈이나 손자에게 선물 사주는 것 등에 주로 사용한다. 가끔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도 내놓는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말고도 이익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건강이다. 면접조사를 하는 날에는 하루에 2만보 정도를 걷는다. 1만보 걷기 운동이 유행했을 정도니까 2만보를 걷는 것은 꽤 좋은 운동이 된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을 이유로 젊은이들과 만나고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삶에 활기를 준다. 면접원끼리의 만남도 즐겁다. 일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지긋한 나이에 새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한다. 이들은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언제 모집하느냐는 전화가 자주 온다. 그렇지만 만 60세가 넘는다고 해서 아무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연락할 것이나 회의 내용, 지시 사항 등을 인터넷을 통해 주고 받기 때문이다.
이제 최혜송 회장에게 남은 일은 사회적 기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이 되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후배들이 들어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줄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회장이라고 해봐야 지분이 있다거나 대단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대표일 뿐이다. 그러니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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