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욕심을 비우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왔다. 산중의 겨울이라 날이 차갑다. 꾸물꾸물한 하늘이 많이도 내려앉았다. 영월 주천의, 꼴두국수(메밀국수의 일종인데 이 고장 사람들이 가난하던 시절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질리게 먹었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로 유명한 신일식당서 아침을 때우는 중이다.
주인 어르신이 날이 추워졌다고 툴툴대다 안주인에게서 춥다고만 하지 말고 옷을 든든히 입으란 지청구를 듣는다. 머쓱해진 주인 어르신은 애꿎은 난로만 매만지다가 밖으로 나갔다. 금세 다시 돌아온 어르신은 함박 웃으며 눈이 내린다고 하신다. 주방에 계시던 안주인이 "눈이 올 때도 됐지. 소설 지난 게 얼만데" 하며 추임새를 넣는데 그 목소리가 밝다. 주천에서도 이번이 첫 눈이란다. 모처럼 많은 손님을 맞을 주말이라 눈이 오면 걱정될만 한데도 노부부는 그냥 눈 오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주천의 첫눈을 맞으며 그곳으로 향했다. 수년 전부터 첫눈이 오는 날에 맞춰 가보려 별렀던 법흥사 적멸보궁이다. 법흥사는 여러 번 찾았던 터다. 여름이고 가을이고 간에 그곳에 들를 때마다 왠지 첫눈이 생각났다. 그리곤 마음 속으로 누구도 밟지 않았을 순정한 눈길을 따라 열반(涅槃ㆍnirvana)을 뜻하는 적멸(寂滅)의 궁으로 걸어가는 상상을 해봤다. 드디어 그 기회가 열린 것이다.
서둘러 국수를 들이키곤 법흥사로 향했다. 길은 벌써 하얗게 뒤덮였고 미끄러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운전대를 잡은 손엔 땀이 흥건해졌다. 맑은 물이 흐르는 법흥계곡에도 흰 눈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조심조심 운전해 들어갔다.
사찰 1km 가량 못 미쳐 작은 턱이 나타났는데 바퀴가 헛돌며 좀체 오르질 못했다. 더는 무리겠다 싶어 차를 대고는 짐을 챙겨 걷기로 했다. 모처럼의 눈길이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밟는 눈이다. 오랜만의 눈과의 스킨십이라 부드득 부드득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길가 늘어진 소나무 가지에도 눈이 쌓인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눈은 하염없이 나린다. 사찰서 들려오는 독경을 장단 삼아 나풀거린다. 하얀 눈길은 적막했다. 시선은 눈길을 지치고 나가는 발끝으로 향한다. 어디로 가냐고, 왜 가냐고 묻는다.
법흥사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곳이다. 진신사리는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취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등으로도 나뉘어 모셔져 있다. 자장율사는 지금의 법흥사 적멸보궁 자리 바로 뒤에 만든 토굴에 진신사리를 모시고 수도를 하다가, 진신사리를 사자산 연화봉 깎아지른 벼랑으로 옮겨놓았다. 사람과 들짐승은 닿기 힘든, 오로지 날짐승과 바람만 가까이 할 수 있는 곳이다.
법흥사 너른 마당을 지나 소나무 우거진 길을 걸어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하얀 숲길에서, 머리를 비우고 삿된 욕망을 떨쳐낼 수 있길 기원하며 한발 한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적멸보궁 안에는 부처가 있을 단 위에 황금빛 방석만 놓여있다. 방석 뒤편 벽면은 유리창으로 뚫려있고, 창 너머엔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고 있는 사자산 연화봉의 풍경이 펼쳐진다. 적멸보궁에선 빈 방석, 빈 창문이 부처이다. 첫눈이 내린 이날, 적멸보궁의 창밖은 함박눈으로만 가득했다. 하얀 눈이 담아내는, 그냥 하얗기만 한 도화지다. 빈 방석 위의 백지로 그려낸 풍경에 마음을 묻는다.
적멸보공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눈은 여전히 그치질 않는다. 돌계단과 숲길의 올라올 때 밟았을 내 발자국의 흔적마저 지워졌다. 내 몸에도 서서히 흰 눈이 쌓여간다.
세밑 비우려 떠난 여행길. 그 비움의 욕심마저 하얀 눈이 지워버린다. 머리 위, 어깨 위로 쌓여가는 눈이 두툼해질수록 그 눈의 무게는 더욱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영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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