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일반 시민이 비정부기구(NGO)를 구성하여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익명성에 기반한 의사표현이라는 새로운 조류도 있다. 종종 익명성 뒤에 숨는 무책임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 익명성에 기반을 둔 전문가 그룹 내부의 치열함이 큰 변화를 만들어 낸 사례로 부르바키 운동을 꼽는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가장 많은 과학자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아는가? 답은 프랑스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전쟁기간에 특별한 재능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과학자를 봉사시켰지만, 프랑스는 평등의 원칙을 엄격히 지켜서 이러한 특수역할이 군 복무를 대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고등사범(École Normale Supérieure)의 경우, 재학생의 3분의 2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그 파장이 도래했다. 프랑스 대학에서는 한창 교육과 연구에 신나 있을 젊은 교수를 보기 힘들었고, 대부분의 교육은 은퇴연령에 가까운 노교수들이 담당했다. 학문의 전달과정에서 공백이 발생했고,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와 연구를 시작한 젊은 연구자들은 지적인 갈증을 느꼈다. 20세기 최고 수학자 중 한 명인 듀도네(Jean Dieudonne) 교수는 고등사범을 마치면서 대수학의 아이디얼(ideal)이 뭔지도 모르고 졸업했노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수학 전공의 대학 3학년생이라면 배우는 평이한 개념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1930년대 중반에 프랑스 젊은 수학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현대수학의 기반을 새로 책자로 정리하고 학생교육에 적용하는 등, 새로운 시작이 절실했던 터였다. 이들은 수학자들의 비밀결사를 만들고 이를 부르바키(Nicolas Bourbaki)라 명명했다. 약 10명 정도의 수학자로 구성되는데, 수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 여러 명도 멤버로 활동했고, 유망한 수학자를 영입하며 세대교체도 해왔다.
이들은 현대수학의 전 분야에 걸쳐 상당 분량의 책을 공동 저술하였고, 이 책들을 모두 니콜라스 부르바키라는 저자명으로 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현대수학을 공리적이고 추상적인 접근으로 재구성하며 20세기 수학의 진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저자가 개인일 거라 여기고 누군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부르바키는 상당 기간 비밀결사로 존재했고, 구성원이나 회합장소 등이 모두 비밀로 부쳐졌다. 연간 3회의 부르바키 학술대회를 비밀스럽게 열어서 수학의 발전방향과 새로운 공동저술에 대해 난상토론을 가지곤 했다. 대회는 회의를 주재하는 의장도 없고 발표순서도 없이 진행되었고, 발표 중에도 비판과 질문을 통해 발표를 중단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제 '부르바키 방식'이라는 표현은 무정부주의적으로 보일 정도의, 이런 난상토론식 회의 방식을 부르는 표현이 되었다.
난상토론의 형식과 함께 '부르바키 방식'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열린 관심'이다. 부르바키 대회에서는 수학의 전 분야에 걸쳐 토론하고 저술방향을 정했는데, 본인의 연구 분야가 아니더라도 토의에 참여하고 심지어는 저술의 일부도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축적된 지식의 양이 방대해지고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토론하는 게 힘든 시대가 되었다. 자기 이름을 감추고 벌이는 학술활동이란 더더욱 힘들다. 부르바키는 아직도 존재하지만 이전의 역동성은 찾아볼 수 없다. 부르바키가 입증했던 익명성의 자유와 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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