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ㆍ1903~1926)는 일본 여인으로, 조선 사람과 결혼하고 조선의 흙이 된 국적 없는 조선(한국) 사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미는 9살이 되던 1912년 조선에 나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살며 3ㆍ1운동을 겪고, 귀국한 것이 17살이었다. 일본에서 조선 청년 박열(朴烈ㆍ1902~1974)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때 맺은 ‘공동생활의 서약’은 그미의 공동체 의식과 민족초월의 평등사상을 뚜렷이 드러낸 글이다.
1. 동지로서 동거할 것. 2. 운동, 활동 방면에 있어서는 (金子文子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 3. 서로는 ‘주의(主義)’를 위해서 그 운동에 협력할 것. 4.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을 잡을 일이 생겼을 때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해지할 것. (金一勉; , 合同出版, 東京, 1973. 55쪽)
가네코 후미코는 ‘청년조선’지에 실린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 한 편을 읽고, 서로 만나기도 전에 벌써 “전 생명을 고양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그를 만나서는 “나는 당신에게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곧 “마음과 마음으로 맺어지고”, “사상적 동지, 사랑의 동거자”로 이어졌다고 했다.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학생으로, 3ㆍ1운동의 탄압을 피해 1919년 10월 도쿄로 건너갔고, 1922년 봄에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동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토벌에 나서서 9월 3일 이들을 붙잡아갔고, 일본 사회주의자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부부를 총살시켰으며, 조선사람 6,000명을 잡아 죽였다. 이 과정에서 박열ㆍ후미코 부부를 천황 암살을 모의한 대역죄인으로 사형수로 만들었다. 이 일로 박열은 일본 정치범 최장기수로 22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의문사로, 스물 세 해의 짧은 삶을 마쳤다. 박열의 주선으로 후미코는 문경의 박씨 선산에 묻혀, 평양 신미리 묘지에 묻힌 애인 대신 그 고향의 흙이 되었다.
라는 자서전에서 후미코는 스스로 반항운동에 동참한 이유와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명분을 뚜렷이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겪은 체험을 중심으로, 학대 받은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을 표준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자각을 뚜렷이 했다.
“나는 본디부터 인간평등을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평등 앞에는 바보도 영리한 자도 없으며,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으며, 땅 위의 자연적 존재로서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삶의 가치는 완전히 평등하며, 모든 삶이 삶이라는 오직 한 가지 자격으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완전히 그리고 평등하게 향유해야 할 터입니다.”(가네코 후미코; ‘천황제 타도는 부부의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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