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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직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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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직 평화!

입력
2010.11.2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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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 때 그녀의 휴대전화엔 무려 5통의 부재중전화가 와 있었다. "이이가 웬 일이니?" 결혼 25년차 남편의 느닷없는 전화공세가 이상하면서도 반가운 듯 그녀가 웃었다. 그러나 통화를 하는 사이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대! 어쩌지, 이를 어째!"

하나뿐인 아들이 백령도에서 군복무 중인 어머니에게 그런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주문처럼 그 말만 외며 그녀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서는데 걸음이 걸리지 않는다. 텅 빈 머리 속은 물음만 가득하다.

왜?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누구를 위해서? 얼마나 더?

갈라진 땅에 태어나서 수도 없이 물었던 질문들, 하지만 한 번도 분명한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들이 다시 뒷덜미를 잡았다. 도대체 이 땅에 살기가 왜 이리 힘이 드는가.

지난 봄 서해 앞바다에서 54명의 생명들을 억울하게 잃었건만 이 가을 또다시 스물, 스물 둘, 생때같은 목숨들이 속절없이 졌다. 서정우, 문광욱. 그 앳된 얼굴 앞에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죄를 짓기도 너무 짧은 생을 산 그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는 세상이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다. 김치백, 배복철, 이순(耳順)의 가장들이 집을 떠나 객지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수백의 주민들이 변변한 세간도 챙기지 못하고 겨울 추위 속에서 피난 길에 올랐다. 젊음은 희망을 잃고 늙음은 안식을 빼앗긴 땅에서 전전긍긍, 오늘의 무사함을 의심하며 하루치의 목숨을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세상을 사는 백성의 두렵고 서럽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는가.

포격 직후 확전 되지 않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말씀을 두고 이적이니 소심이니 말들이 많다. '그런 말이 나오도록 한 X자식들을 청소해야 한다'고 울분을 터뜨린 여당 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과 불안으로 노심초사하던 그날 밤, 내가 그나마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그 말 덕분이었다. 권력을 위해 사람 목숨을 볼모로 삼는 자들의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최선의 미래를 준비하려는 그 노력에서 나는 평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겁하고 소심하다고 비난하지만,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모한 용기보다 앞날을 염려하는 소심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들 때문에 60년 전 이 땅엔 전쟁의 피바람이 불었고 수백 만 명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그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 한반도에는 평화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한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라는 소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임이여 나는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렵니다. 죽어도 이 나라 한 점으로 있으렵니다"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얼마 전 토로하였다. 통일이 되면 이 나라를 떠나 민족을 잊고 싶다고, 분단의 현실이 지긋지긋하다고. 벼랑 끝에서 벼랑 끝으로 미는 이 현실이 왜 지긋지긋하지 않으랴. 그러나 통일은 멀고 민족은 여전히 멱살을 잡고 있어 시인도 나도 우리 모두 이 곳을 떠나지 못하니, 지금은 다만 기도할 시간. "명사보다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 나는 하나하나의 이름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슬픔으로 져버린/ 온갖 나무들의 낙엽에 덮인/ 말없는 흙에도 닿아 있고 싶었다/ 발 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이 작은 꽃들이 핀 듯 찬란하였다"(고은, 에서)고, 간절한 노래로 떠난 넋을 위로하고 오지 않은 평화를 기도할 뿐이다.

김이경 소설가ㆍ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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