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몸보신의 해다.”
지난해부터 얼어붙은 뮤지컬 시장에서 제작자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고 가는 말이다. 수익이 불투명한 창작보다는 이미 검증받은 작품으로 재정적인 안정을 확보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난해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부진으로 큰 타격을 입은 뮤지컬해븐 등 일부 제작사는 올 한 해 자체 제작을 최대한 접고, 제작 대행으로 리스크를 줄이는 행보를 이어오기도 했다.
제작사의 몸 사리기가 공연시장의 최대 대목인 12월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대작 뮤지컬이 몰려온다지만 신작을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다. ‘지킬 앤 하이드’(샤롯데씨어터), ‘아이다’(성남아트센터), ‘금발이 너무해’(코엑스 아티움), ‘삼총사’(충무아트홀) 등은 재공연인데다 라이선스 작품이다. 조승우를 전면에 내세워 12월 한 달 평균 예매율이 90%에 육박하는 ‘지킬 앤 하이드’는 무려 다섯 번째 공연이다.
지난해 초연된 ‘영웅’(국립극장)만이 대극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창작 뮤지컬이다. 26일 공연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의 연말 뮤지컬 예매 순위에 따르면 1~5위는 ‘빌리 엘리어트’ ‘지킬 앤 하이드’ ‘아이다’ ‘오페라의 유령’ ‘삼총사’로, 라이선스 뮤지컬이 휩쓸었다. 창작 뮤지컬은 ‘라디오스타’ ‘김종욱 찾기’가 6위, 10위에 겨우 올랐다. 지난해 연말 ‘남한산성’ ‘퀴즈쇼’ ‘달콤한 나의 도시’ ‘영웅’ 등 창작 신작이 풍년을 이뤘던 것과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뮤지컬 평론가 조용신씨는 “2004년부터 시장을 쭉 봐왔지만 소위 5대 공연장(LG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샤롯데씨어터, 충무아트홀)이 재탕과 라이선스 위주로 채워진 건 처음인 것 같다”며 “창작에 의지를 보이며 꾸준히 제작비 지원 공모에 도전하던 한 제작사도 내년까지 완전히 라이선스 공연으로 무장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올 한 해 공연시장이 극도로 침체된 탓이 크다. 10편 중 9편은 고배를 마셨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공연 제작 및 투자를 해온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최근 5년 동안 신작의 평균 수익은 마이너스였지만, 재공연은 보통 20%가 넘었다”며 “새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연말에는 안정적인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더 뼈아픈 건 대극장에 올릴 만한 창작물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간 창작물의 콘텐츠가 부실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꾸준히 발전시킬 기회도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가령 신작이 수익을 내려면 장기공연이 필수인데, 주요 공연장은 이들 작품에 오래 자리를 내줄 형편이 못됐다.
영화와 달리 공연은 당연히 앙코르가 가능한 장르다. 관건은 같은 작품을 얼마나 발전시켜 가느냐에 있다. 올해 ‘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오페라의 유령’ ‘미스사이공’ 등의 부진한 성적은 관객들이 더 이상 브랜드에 목매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씨는 “올 연말 공연은 스타와 브랜드에 기댄 측면이 크다”면서 “돈벌이 수단이 아닌 예술품으로 인정받으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넌센세이션’처럼 작품 자체를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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