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바다를 한참 달려 그 섬에 이르렀다. 저 평온한 물밑에선 빙긋 웃고 있는 표정의 크고 넓적한 물고기가 꿈틀대고 있을, 홍어의 섬 흑산도다.
오후에 도착한 터라 일주도로 투어로 잠깐 흑산의 맛을 본 뒤 다음날을 기약했다. 섬에서의 고독한 밤을 보낸 뒤 먼동이 트기 전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흑산항의 홍어 경매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수협위판장은 어선에서 비치는 불빛으로 반짝였다. 크레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배에서 홍어가 가득 실린 바구니를 끌어 올렸다. “크레인 소리 나는 것 보니 웬만큼 잡았나 보네.” 한 두 명씩 위판장으로 몰려드는 중매인들이 밝은 웃음을 지었다.
배에서 올라온 홍어는 바닥에 부려졌고, 어부와 수협 직원들은 일일이 무게를 재고, 홍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등급별로 줄을 세운다. 우선 암치와 수치가 구분되고, 다음 무게에 따라 1~5등급으로 나뉜다. 또 껍질의 상처 정도에 따라 생채기가 많으면 등판을 위로 뒤집어 놓아 구분한다. 제자리를 찾은 홍어엔 바코드가 부착된다. 흑산 홍어를 보증하는 이름표다.
이렇게 1시간 여 홍어가 다 준비된 뒤 드디어 경매가 이뤄졌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매가 시작됐고 위판장엔 긴장이 가득했다. 암치 1등급이 55만5,000원에 낙찰됐다. 어제 있었던 경매에선 77만5,000원이었단다. 하루 사이에 20만원이 출렁거렸다. 이날 물량이 의외로 많아서다. 모처럼의 풍족한 물량으로 바삐 손짓 눈짓을 교환하는 경매사나 중매인들의 입가엔 흡족함이 가득했다.
본격적인 홍어철이 시작됐다. 홍어는 일정 기간 금어기를 제외하곤 사철 잡히지만 예부터 겨울 홍어를 제맛으로 쳐왔다. 흑산도에서 맞은 제철 맞은 홍어를 만났다. 그리고 홍어에 대한 비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홍어 아무나 잡나?
흑산면의 인구가 4,700여명 된다지만 홍어잡이 배는 딱 7척만 허가 받았다. 홍어는 또 총허용어획량(TAC) 제한을 받는 수산물이다. 많이 나더라도 많이 잡을 수가 없다. 올해 배정된 물량은 170톤. 이를 7척의 배가 나눈다.
홍어는 수협 위판장을 통해서만 거래된다. 경매에 나설 수 있는 중매인들도 지정돼 있다. 흑산도의 홍어 중매인은 20명. 이들이 홍어 도매상들이다. 이들을 통해 홍어가 흑산도의 다른 식당이나 육지의 홍어 소매상과 음식점, 식도락가들에게 전해진다.
흑산 홍어에 바코드가 부착된 건 작년부터다. 무게, 위판날짜, 중매인 이름 등이 기록된다. 중매인들 대부분 자신의 가게를 운영한다. 38번 중매인인 김경우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서울과 목포 등의 유명 식당과 홍어맛을 아는 단골들에게 홍어를 대고 있다.
육지 사람들은 홍어는 무조건 삭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홍어의 원조인 흑산 사람들은 싱싱한 채로 먹는다. 김씨는 “싱싱한 흑산 홍어를 씹으면 달디 달다”고 했다. “삭힌 홍어엔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곁들인 삼합이 제짝이라면, 싱싱한 흑산 홍어는 홍어애(홍어간)와 회를 참기름장에 찍어 김치에 싸먹는 게 최고”라고 덧붙였다.
흑산도의 식당들은 싱싱한 회와 삭힌 홍어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제대로 된 싱싱한 홍어회는 흑산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데 그 맛을 모르고 무조건 삭힌 것만 찾는 외지인들이 때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홍어 이야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홍어 한번 먹어보자 청을 했다. 김씨가 직접 흑산도식 홍어 한 쌈을 싸주었다. 눈을 감고 조심스레 입에 물었다. 물컹, 흑산의 바다가 한 입에 들어왔다. 찰진 바다의 싱싱함이 코끝으로 올라왔다.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
경매 하기 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홍어의 암수를 구분하는 것이다. 유독 암컷과 수컷의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암치는 최고 15kg까지도 나가는데 수치는 7kg 넘기가 쉽지 않다. 같은 크기라도 암치가 50만원 나간다면 수치는 25만원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다. 맛의 차이 때문이다. 암치의 육질이 훨씬 부드럽다. 흑산도 문화관광해설가인 김기백씨는 “암치가 헤비급이라면 수치는 기껏해야 밴텀급 정도 될 것”이라며 “암치와 수치의 육질은 찹쌀떡과 시루떡의 질감 차이”라고 비유했다.
홍어 암치는 넓적한 몸뚱이에 꼬리 하나가 달렸고, 수치는 그 꼬리 양 옆으로 길쭉한 생식기 2개가 늘어져 있다. 같은 홍어라도 암치와 수치의 값이 다르니 홍어 잡는 어부의 눈에는 수치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의 생식기는 잡아 뜯어내기도 쉬워, 홍어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생식기만 뽑아 암치로 속여 파는 못된 상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의 출발점은 암컷에 비해 모든 게 모자란 수컷의 비애 때문이었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전 선생의 에는 ‘두 날개에는 가는 가시가 있어서 암수가 교미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합한다. 낚시를 문 암컷을 수컷이 덮쳐 교합하다가 함께 잡히기도 한다. 결?암컷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어 음(淫)을 탐하는 자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적혀있다. 관광해설가 김씨는 “평소 조그만 수치를 무시하던 암치는 좀체 몸을 허락하지 않는데, 암치가 미끼에 혹해 낚시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수컷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었다가 함께 잡혀버린다는 이야기”라고 보충설명을 해준다. 수컷의 수치스러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정말 만만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영산포와 흑산도의 인연
삭힌 홍어는 전남 나주 영산포에서 기원한다. 뱃길의 길목으로 번성했던 포구인 영산포에 모든 산물이 집결했을 때 이야기다. 영산포까지 들어오는 여러 날의 뱃길에 다른 생선은 다 썩어 먹을 수 없는데 홍어는 푹 삭기는 했지만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 냄새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맛에 사람들은 전염됐고 남도의 잔칫상을 점령하는 대표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싱싱한 홍어의 흑산도와 삭힌 홍어의 영산포의 인연은 그 전으로 올라간다. 고려말 공민왕 때다.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자 나라는 섬을 비워버리는 정책을 폈다. 당시 흑산도의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한 곳이 바로 영산포 인근이었다. 고향을 그리던 주민들은 흑산도 바로 앞에 떠있는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영산도에서 딴 이름을 새 터전에 붙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 영산현이 됐고, 거슬러온 강물의 이름에도 붙었다. 그 강길 뱃길로 홍어가 오가며 흑산도과 영산포의 세대를 아우른 인연이 이어져 왔다.
홍어장사꾼 문순득 표류기
정약전은 흑산도에 머물며 말고도 여러 책을 남겼다. 도 그 중 하나다. 조선 후기 소흑산도로 불리는 우이도에 살던 상인 문순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홍어장사꾼이다. 흑산도서 홍어를 사가지곤 나주 영산포로 실어 나르며 돈을 만졌다. 1801년 12월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했는데, 수일 뒤 배가 닿은 곳은 지금의 오키나와였다. 그는 이곳에서 열달을 머물다 간신히 청나라로 가는 배를 얻어 탔는데, 지지리 복도 없지, 이 배 또한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여송국, 지금의 필리핀이었다. 그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타국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빨리 배웠고, 품을 팔아 귀향할 돈을 만들었다. 그리곤 동남아를 한바퀴 돌아 청나라를 거쳐 결국 고향에 안착했다. 처음 표류해서 다시 가족 품에 안기기 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5년이다.
그는 이후로도 홍어장수로 이름을 날리며 살았다. 그맘 때 제주에 여송국 사람들이 표류해왔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문씨가 찾아가 이들과 그들의 말로 대화를 나눠 여송국 사람들을 본국에 송환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홍어장수 문씨는 국내 첫 필리핀 통역사이기도 했다.
홍어가 만들어낸 거짓말 같이 재미난 이야기가 아닌가.
흑산도(신안)=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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