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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회경제사상’ 낸 박경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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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회경제사상’ 낸 박경준 교수

입력
2010.11.2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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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래된 추궁 하나. 무아(無我)와 열반(涅槃)을 추구하는 불교는 결국 사회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현실도피적인 종교가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서구에서는 사회학의 거장 막스 베버부터 불교를 사회운동과는 무관한 개인구제의 종교로 봤고 근래에는 좌파 이론의 선두주자인 슬라보예 지젝도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며 불교를 비판한다. 사회 현실에 눈을 감도록 해 현실 정당화의 도구로 이용된다는 논리다. 이는 불교의 업(業)설을 숙명론으로 오해한 측면이 크지만, 불교계 자체가 사회사상 논의에 소홀했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박경준(57)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는 이런 비판에 대한 응답을 30여년간 천착해온 학자다. 불교에서 ‘개인의 생사 해탈’과 ‘공동체의 정의 추구’가 따로 떨어진 과제가 아님을 밝혀온 그가 최근 학문적 연구성과를 종합한 (동국대출판부 발행)을 냈다.

한국 불교가 각종 사회문제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매섭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만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대중적 삶의 현실과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당연시해왔던 일부 선가의 시대착오적 풍토에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불교가 시대상황의 요청에 부응하는 사회ㆍ문화적 이념 계발을 등한시해왔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일견 길항 관계로 보이는 두 과제를 묶는 고리로 제시하는 것은 ‘공업(共業)’설이다. 개인의 운명은 공동의 업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으로 공동의 사회적 선업이 뒷받침될 때 개인의 행복도 성취된다는 것이다. 공업이란 용어는 원래 2세기 부파불교(部派佛敎ㆍ원시불교가 분열을 거듭해 20여개 교단으로 갈라진 시대) 경전에서 자연 환경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인데, 박 교수는 이를 사회제도적 환경으로 확장시켜 불교 사회참여의 실천적 근거로 삼고 있다.

중생 구제를 내세운 대승불교에도 이런 공업 사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해석이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4대(四大ㆍ지수화풍의 자연환경)와 시절(時節ㆍ시대적 상황)과 토지와 인민들로 인해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본업만으로 인해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라는 열반경의 구절도 바로 인과응보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것도 자연환경뿐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구현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좋은 과보를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법과 제도의 확립, 즉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불교적인 정언명령”이라고 강조했다.

불교의 사회경제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상황이다. 박 교수는 이 같은 공업 사상을 바탕으로 분배론, 생산과 소비 윤리, 직업관과 노동관 등 사회경제 각 분야의 불교적 입장을 탐색한다. 예컨대 초기 경전에 언급된 빈궁전(貧窮田ㆍ가난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한 이를 위한 밭)에서 그는 현대의 사회복지 개념을 읽어낸다.

박 교수는 “불교는 언제나 시대에 대한 도전이었다”며 “불타의 교설을 화석화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살아 숨쉬는 가르침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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