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 생산~소비 자동 조절 '똑똑한 기술' 수출 성큼성큼
23일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30분쯤 차를 타고 가자 바닷가에 줄지어 선 풍력발전기 수십기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많은 이 곳의 특성을 활용, 자연 환경을 해치지 않으며 에너지를 얻고 있는 것. 풍력발전기뿐 아니라 주택 및 공공기관 건물 위엔 태양광 발전을 위한 전지판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곳 제주 구좌읍 월정리와 세화리, 덕천리 일대엔 전력 송ㆍ배전망에 정보기술(IT)을 결합시켜 에너지 사용의 최적화를 도모하는 지능형 전력망(스마트그리드) 실증 단지와 데모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다. 에너지 수입국인 우리나라를 10년 후 에너지 기술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키고, 25조원으로 성장할 에너지 효율 시장을 잡기 위한 꿈과 도전이 시작되고 있는 현장이다.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의 심장부는 바로 한국전력 스마트그리드 홍보관 지하에 위치한 종합운영센터. 제주 실증단지 전력 계통도와 각 가정의 전력 사용 현황, 전기차의 운행 및 충전소의 운영 상황 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대형 전광판이 한쪽 벽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특히 1시간 후 풍력이나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의 발전량을 미리 예측한 뒤 다시 이를 발전량 및 사용량과 비교하며 전력 공급망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기능이 돋보였다. 다만 1시간 전인 오전 9시의 신재생 에너지 발전 예측량은 0.1㎿h였지만 실제 발전량은 0.06㎿h로 큰 차이가 났다. 1시간 전에는 풍력 및 태양광을 통해 0.1㎿h의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됐었지만, 실제로는 60% 밖에 발전을 못했단 얘기다.
사실 스마트그리드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가 이런 신재생 에너지의 특성에서 출발한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신재생 에너지 발전을 늘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재생 에너지는 전력 생산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풍력발전의 경우 바람이 늘 일정한 세기로 부는 것은 아닌 만큼 발전량이 들쭉날쭉하기 일쑤이다. 태양광 발전도 계절에 따라, 또 날씨가 좋을 때와 나쁠 때의 발전량은 크게 달라진다.
이 때문에 신재생 에너지 발전량이 늘어난다 해도 안정적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화력 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신재생 에너지 발전의 신뢰성을 높이는 게 관건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스마트 그리드다. 풍력 발전과 태양광 발전의 경우 바람이 세게 불 때나 햇빛이 쨍쨍할 때 발전을 많이 한 뒤 에너지를 공급하고, 남은 에너지는 일부 저장하게 하는 것. 이 저장 에너지를 바람이 멈추고, 해가 졌을 때도 어느 정도 공급하게 함으로써 상품성을 높인다는 게 기본 개념이다.
특히 전력망을 통해 공급자와 수요자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 에너지 생산 뿐 아니라 소비면에서도 효율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는 점도 스마트 그리드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미래의 모습을 구현해 낸 것이 바로 한전 스마트그리드 홍보관 1층의 스마트플레이스 코너이다. 가정 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뒤 각종 스마트그리드 설비를 갖춰 놓은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단말기로, '에너지 사용정보 표시 장치'로 불리는 IHD(In Home Display)와 스마트미터기다. 태블릿PC 크기의 IHD엔 지금 집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기의 양과 요금 등이 실시간 표시되고, 이러한 정보를 통해 집안의 조명 및 가전제품들을 자동 제어할 수 있다. 스마크그리드가 구축되면 전기 요금이 실시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IHD를 통해 전기 요금이 쌀 때에는 가전 제품들을 많이 가동하고, 전기 요금이 비쌀 때는 최소한의 가전 제품만이 작동토록 하는 방식이다.
한전 관계자는 "스마트 그리드가 구축되면 전력 생산과 공급, 소비의 모든 과정에서 효율성이 높아지며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자원의 수입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 에너지 효율 기술까지 확보, 신시장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2020년 당신의 하루는
2020년 전남 광양시 옥룡면의 한 가정집. 눈을 뜬 박나리(28)씨가 부엌으로 가자 전기 밥솥엔 전기 요금이 비싸지기 직전인 새벽에 지어진 밥이 이미 보온 상태이다. 출근 준비를 끝낸 박씨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작동 시간을 오전 10시로 맞춘다. 아침이나 늦은 밤엔 1시간에 70원 정도인 전기 요금이 오후 2시를 전후로 한 시기엔 200원까지 올라가는 만큼 전기도 이젠 스마트하게 사용해야 한다. 특히 박씨는 이날 오후 시간대엔 냉장고를 뺀 나머지 가전 제품들은 모두 꺼 놓도록 설정했다. 에너지 사용량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소형 모니터인 IHD에 오후 1~3시 전기 사용량을 전날보다 20% 이상 줄일 경우 한전에서 전기요금을 5% 할인해 준다는 이벤트 내용이 떴기 때문이다. .
차고에는 밤 사이 충전된 2인승 전기차가 대기하고 있다. 한 번 충전으로 200㎞를 가는데, 출ㆍ퇴근용으로 딱이다. 5년 전만 해도 한달 30만원이나 들던 차량 운행비는 이제 1만원 정도로 줄었다. 한 시간 충전에 드는 전기 요금이 200원 정도고, 5시간 가량 충전하면 3일 정도 쓸 수 있다. 밤사이 충전하지 못했을 땐 주유소의 고속 충전기를 이용한다. 30분 걸리던 충전도 이젠 1분이면 완료된다. 주행 중 충전이 필요할 땐 통신 회사에서 스마트폰으로 충전할 때가 됐다는 사실과 함께 가까운 충전소 위치를 자동 안내한다.
박씨의 친구인 이재연(28)씨는 아예 집 지붕에 태양광 발전을 위한 전지판을 깔고, 작은 풍력 발전기도 설치했다. 원래 설치비는 모두 500만원 정도지만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50%를 지원하는 덕에 250만원밖에 안 들었다. 태양광 및 풍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저장했다 쓸 수 있는 '에너지 저장장치'도 갖춰, 해가 뜨지 않을 때나 바람이 불지 않아도 걱정이 없다. 집 안에서 쓰고 난 뒤 남은 전기는 한전에 팔 수도 있다.
이씨의 회사 사무실이 입주한 곳은 빌딩에너지관리시스템(BEMS)을 적용하고 있다. 빌딩 옥상과 벽면에 태양전지판과 풍력발전기가 설치돼 있어, 여기에서 직접 전기를 생산한 뒤 사용하고 지열을 활용해 냉난방을 하고 있다. 종합에너지통제실에서는 각 층마다, 또 각 사무실마다 에너지 소비를 점검, 컴퓨터를 켜 놓고 퇴근해도 자동으로 전원을 차단한다.
10년 후 스마트그리드를 중심으로 한 한국형 마이크로 에너지 그리드(K-MEG)가 바꿔 놓을 생활상을 그려본 것이다. 제주 실증단지에서 이러한 미래의 주거 및 교통 생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들을 실증하고 있는 고석범 KT 제주스마트그린센터장은 "최근 무선인터넷과 통신이 결합해 스마트폰 세상을 연 것처럼, 전력과 통신이 융합된 참여형 스마트그리드 서비스가 또 한번 미래를 바꿔 놓을 것"이라며 "지능형 전력망을 양방향 통신 인프라 및 충전 인프라와 함께 구축, 가정ㆍ직장ㆍ교통이 결합된 스마트 시티를 구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남은 과제와 전망
서울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11,12일 제주에선 또 하나의 큰 행사가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9~14일 진행된 한국스마트그리드주간(KSGW) 행사엔 구자균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장과 귀도 바텔 국제스마트그리드협회장 등 12개국 500여명이 참석했다. 당시 외국에서 온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스마트그리드와 관련, 주택ㆍ교통ㆍ빌딩 등 다양한 분야를 한 곳에서 실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이 지난달 확정한 5대 분야 미래 산업 선도 기술 중 '코리아 마이크로 에너지 그리드'(K-MEG)는 우리의 강점인 스마트 그리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좀 더 넓은 개념의 에너지 효율 종합 기술을 지향하고 있다. K-MEG은 2015년 이후 그린에너지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시작됐다. 소비자가 직접 에너지를 생산하고, 각종 에너지 정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에너지 프로슈머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이는 만큼 에너지 산업을 신주력산업화해 에너지 수입국에서 에너지 기술 수출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 전략기획단의 제언이다. 우리나라가 이 기술을 확보, 그린빌딩(선진국), 산업단지(중진국), 고립마을(후진국) 등을 집중 공략할 경우 2020년엔 25조원의 매출을 거둘 것이라는 게 전략기획단의 예상이다.
다만 아직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은 것은 위험요소이다. 그러나 한전을 비롯 전력거래소, KT, SK텔레콤, SK에너지, GS칼텍스, 포스코, LG전자, 현대중공업, 삼성SDI 등 다양한 기업이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대목이다. 새로운 융합형 신산업 또는 서비스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경부 관계자도 "인터넷도 처음엔 수익성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며 "규모의 경제가 되고 기술까지 발달하면 수익성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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