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전 5월 24일 아침 이명박 대통령은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 앞에 섰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소행이라는 국제조사단의 결론이 나온 뒤였다. "참고, 또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북한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어떤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극적 억제원칙을 견지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엊그제, 연평도가 북한의 무차별 포격에 당했다. 꽃같은 해병과 애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고 터전 잃은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은밀히 저질러놓고 오리발을 내미는 종전방식이 아니었다. 적은 백주에 대놓고 우리 땅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극도의 무시가 깔린 공격이었다.
천안함 겪고도 달라진 게 없다
당장 국토가 유린되고 국민이 희생된 치욕의 상황에서 "대통령이 확전 안되게 관리를 잘하라고 지시했다"는 첫 청와대 발표가 나왔다. 다들 귀를 의심했다. 뒤늦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라며 허겁지겁 말을 뒤집어 "만전을 기하라는 뜻"이라고 했다가 저녁에야 "단호 응징"만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늦었다. 1시간을 넘긴 숙고 끝에 나왔을 첫 발표가 대통령을 포함한 이 나라 안보지휘부의 생각임을 다 알게 된 뒤였다. 밤 늦게 "추가도발 시 몇 배 응징" 발표는 하도 같잖아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군 복무를 피한 이들이 수두룩한 안보팀 구성원들의 짐짓 심각한 표정을 TV로 보며 사람들은 욕을 해댔다.
국방부 합참도 '역시나'였다. 전군이 참여하는 호국훈련의 범위도 몰라 헤맨 것부터 포격시간, 포탄 발수, 희생규모 등에 이르기까지 수정과 번복을 거듭했다. 천안함 이후 그토록 쇄신과 전비 확립을 약속했으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소 국방당국은 적이 해안포나 장사정포를 발사할 경우 초탄 피해는 불기피하지만 늦어도 4~5분 뒤면 발포지점을 확인, 곧바로 파괴할 수 있다고 장담해왔다. 장사정포 공격에 대응한 수도권 방어개념도 그렇게 돼 있다. 그렇다면 1차 피격 5분 안에 발포지점 조준사격이 이뤄지고, 이로 인한 적 포대 괴멸로 2차 피격은 아예 없어야 했다. 그러나 늦은 대응 끝에 또 공격을 당했고 2차 대응은 더 지연됐다.
사실 일선 부대엔 뭐랄 것도 없다. "단호히 대응하되, 확전은 안 된다"고 하면 뭘 어쩌란 말인가. 이 헷갈리는 지시를 결과적으로 해병대 포병들이 절묘하게 이행한 셈이 됐다. 적의 170여 발 포격에 80발만 응사했으니 연평도의 K-9 6문이 1시간 가까운 교전에 평균 13~14발씩만 쏜 게 된다. 분당 최대 6발 사격이 가능한 포로 수백 발을 퍼부을 수 있는데도 극도로 자제하면서 확전을 막은 것이다.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 쓰기 위해 참호까지 핀포인트(pin-point)공격이 가능한 JDAM, SLAM-ER 같은 초정밀 유도무기가 확보돼 있는데도, F-15K, KF-16 전투기들은 초계비행이나 하다 내려왔다.
타이밍도, 신뢰도 모두 잃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당한 천안함 때는 그래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쇠고기파동, 정부인사 등 급박한 대처가 필요한 때마다 MB는 번번이 시기를 놓쳤다. 이번에도 즉각 제압했더라면 적어도 후속상황 관리의 주도권은 우리가 잡았을 것이다. 타이밍 잃은 지금에선 상대가 콧방귀도 안 뀔 엄포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금강산 피격사건을 보고 받고도 한마디도 언급 않은 집권 초 국회 개원연설까지 떠오른다.
3년 전 MB를 뽑은 보수층은 그가 대북문제에서만큼은 분명하게 자존심을 세워줄 것을 기대했고, 그럴 실력도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번번이 본 대로다. 국제비즈니스 등에서나 제한된 능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번 일로 그는 국가와 국민을 보위하는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신뢰감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뭔가 그래도…'하는 미련마저 접어야 할지, 고민스럽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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