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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5>프라이부르크-모든 도로는 사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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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5>프라이부르크-모든 도로는 사람의 것이다

입력
2010.11.2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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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페인트로 구분된 주차구역에 세워진 차들이 골목 양쪽에 길게 줄을 짓고 있고, 그 사이 좁다란 길을 따라 차가 무시로 오가고, 그래서 걷기에 불편하고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행여 차에 치일까 조마조마한 곳이 우리 도시에 흔한 주택가 골목이다. 부족한 주차공간 때문에 이웃들이 언성을 높이는 일도 다반사. 내 집 앞, 내 동네를 편안하게 거닐고 싶다는 당연한 바람은 차도나 주차장과 다름없는 골목 환경 앞에 무력하다.

유럽에서 20년도 더 전인 1988년 '도로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인식 아래 유럽의회 차원에서 '보행자 권리 헌장'을 제정, 누구나 쾌적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보행권을 명문화했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보행권이 철저히 무시되는 현실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서울 등 7대 도시에서 2003~2007년 발생한 교통사고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교통사고 사망자 2명 중 1명이 보행 중에 숨졌고, 이들 중 40% 이상이 폭 6m 미만의 생활도로 즉 주택가 골목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특히 14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고령자는 보행 중 사망한 비율이 전체 교통사고 사망의 절반을 넘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州) 프라이부르크 시에 위치한 인구 5,800명의 주거단지 보봉(Vauban)은 철저히 보행자 중심적인 마을 설계로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보봉이 속한 프라이부르크부터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보행자 중심 도시다. 독일 남서부 가장자리로 프랑스, 스위스와 맞닿아 있어 중산층의 은퇴 후 거주지로 각광받고 있는 이 도시는 대중교통과 자전거 중심의 교통정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1972년에 이미 도심 차량 진입을 금지하는 선구적 정책을 폈던 이 도시는 현재 자전거 교통이 전체 교통량의 30%를 차지하고 자전거 전용도로의 길이가 160㎞에 이른다. 프라이부르크가 지향하는 '차 없는 도시'를 가장 극적이고 압축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보봉이다.

보봉은 2000년 입주가 시작된 신흥 주거지로, 시내 중심부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면적은 38만㎡로 서울의 동(洞) 면적의 절반 정도.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마을로 들어설 수 있는 보봉로(Vaubanallee)가 나온다. 마을을 횡단하는 이 도로에는 노면전차(tram) 선로와 차도가 함께 나 있고, 전차와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을 위한 정류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있다.

마을의 주도로인 보봉로를 중심으로, 보봉은 처음 방문한 사람도 마을 구조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패턴을 이루고 있다. 보봉로 양쪽으로 조성된 주택가에는 블록마다 'ㄷ'자형 도로가 나 있어서, 차가 주도로에서 주택가로 진입했다가 다시 주도로로 빠져나올 수 있게 돼 있다.

이들 주택가 도로에는 진입로마다 동일한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공놀이를 하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파란색 바탕에 그려져 있는 이 표지판이 뜻하는 바는 그 아래 간판에 적힌 글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곳엔 주차공간이 없다 ▦걷는 속도로 차를 몰아야 한다 ▦보행자들은 길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 ▦길 전체가 아이들 놀이터다 등이다. 즉 보봉의 모든 주택가 도로는 '놀이도로'라 불리는 교통 정적화 구간으로,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차량 출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구역이다.

보봉은 주민들이 시로부터 땅을 직접 사서 살 집을 짓는 방식으로 조성된 주택지인데, 주민들은 애초 자기 토지에 주차장을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느 주택지라면 주차용으로 쓰이고 있을 집 앞 공간은 모두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을 찾은 기자를 안내해준 주민 안드레아스 델레스케 씨는 "차에 싣고 온 물건을 내리기 위해 잠시 집 앞에 정차할 때 외에는 주택가 도로에 차를 세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의 주택가 도로라면 주차공간은 물론 차도와 구분되는 보도를 만들어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주민은 정원을 늘릴 수 있고 시는 보도를 관리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봉이 이처럼 주차장 없는 주택지구를 구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자동차 보유율이다. 보봉 입주자 1,750세대(2006년 현재) 중 차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세대는 450세대로, 3세대 중 1세대 꼴이다. 인구 1,000명 당 자동차 보유 대수로 따지면 85대로, 그 수치가 585대인 독일 전체는 물론이고 414대인 프라이부르크와도 비교가 안되는 경이로운 성과다. 한국의 경우 2007년 현재 자동차 보유율은 인구 1,000명 당 319대이다.

보봉에서 차를 보유하려면 적?않은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차는 마을 입구 등에 있는 입체주차장 2곳에 세워야 하는데, 차 소유주는 1대당 1만7,500유로인 주차 공간을 구입해야만 한다. 일반 주택지에서 집 앞 주차공간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8,000유로의 2배를 넘는 비용이 든다.

대신 주민들은 자전거를 적극 활용한다. 자전거도로가 잘 갖춰져 있어 자전거를 타도 15분 정도면 도심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차 없이도 원활한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 보봉의 자전거 보유율은 주민 1,000명 당 858대로, 마을 전체 교통량의 50%를 자전거가 담당하고 있다. 7분30초 간격으로 운행되는 노면전차, 15분에 1대꼴로 운행되는 버스도 유용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주민의 10~15%는 마을 안에 직장이 있기 때문에 평소 도보로 출퇴근한다. 카 셰어링 제도도 활성화돼 있어서 350세대 정도는 저렴한 비용으로 차를 빌려 자가용처럼 쓴다.

집 앞이 모두 놀이도로인 만큼 보봉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 주민 중 30%가 18세 이하로, 프라이부르크 시에서 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델레스케 씨는 "마을이 생긴 이래 교통 사망사고가 딱 1건 발생했는데, 주민이 아니라 일본인 대학생이 부주의로 전차와 충돌해서 일어난 사고"라고 말했다. 아동 교육기관도 유치원 4곳, 초등학교 1곳으로 지역 규모에 비해 그 숫자가 많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입주 초기부터 협동조합을 만들어 250명 정도의 아이들이 말, 양, 염소, 토끼 등 동물을 직접 기를 수 있는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차에서 놓여난 도로는 무엇보다 이웃 간의 훌륭한 사교의 장이 된다. 델레스케 씨는 "예전에 살던 마을은 보봉보다 인구가 적은데도 차 때문에 너무 시끄러웠다"며 "이곳에서는 이웃들이 도로 한복판에서도 조용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진정한 공동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내 살 곳은 내가 만든다" 주민들이 직접 마을 조성

보봉은 자동차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춘 단지 설계, 태양 에너지의 적극적 활용 등으로 세계적인 생태 주거지로 각광받고 있다. 올해는 그 자체로도 생태도시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를 대표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도시엑스포에 초청받아 다시금 주가를 높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주목받은 보봉의 진면목은 이 마을이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유엔 인간정주회의는 1996년 이스탄불 회의에서 당시 한참 건설되고 있던 보봉을 ‘시민 참여를 통한 도시계획의 모범사례’로 일찌감치 주목했고, 2002년에는 최우수 사례로 꼽았다.

‘내가 살 곳은 내가 만든다’는 주민들의 의지와 아이디어를 한데 모아 보봉을 특별한 마을로 만든 조직이 ‘포럼 보봉’이다. 독일 최초로 카 셰어링 협동조합을 설립한 마티아스 마틴 뤼프케, 도시지리학을 전공한 사회운동가 안드레 호이스 등이 주도해 1994년 만든 포럼 보봉은 ‘소셜 에콜로지(social-ecology) 주택지’, 즉 생태와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새로운 유형의 주거지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대상으로 프라이부르크 시가 추진하던 주거단지 조성 사업을 선택했다. 당시 프라이부르크 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군이 주둔하다 독일 연방정부에 반환한 보봉 지구 34만㎡를 사들여 극심한 주택난을 해소할 주거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설립 2주 만에 보봉 입주 희망자 60명을 회원으로 맞은 포럼 보봉은 차 없는 주택지 만들기, 녹지의 유지와 보호,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생활환경 조성, 은행에 의존하지 않는 융자 시스템, 인접지역에 미래형 상공업 유치 등의 기본 원칙을 세우고, 주(州)개발공사, 시 도시계획국, 시 의회 등 관계기관과의 꾸준한 접촉을 통해 도시설계 과정에서의 지분을 확보했다. 보통 주개발공사가 맡아온 주민참여 기능을 포럼 보봉이 담당하고, 건설 당국과 시 의회가 주택지 개발계획 수립을 위해 구성한 위원회 ‘보봉 워킹 그룹’에 포럼 보봉 대표가 참여한다는 입장을 관철한 것이다.

도시설계, 건축, 교통 등에서 식견을 지닌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덕분에 포럼 보봉은 단순한 시민운동기구를 넘어선 민간 싱크탱크로서 마을 설계 및 조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 인터뷰/ 마티아스 마틴 뤼프케 前포럼 보봉 대표

마티아스 마틴 뤼프케(59)씨는 '포럼 보봉' 초대 대표를 맡아 보봉 설계 과정에 깊숙이 참여한 인사다. 일찍부터 자동차 감축 문제에 관심을 갖고 1991년 독일 최초로 카 셰어링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동차는 우리에게 이동의 자유를 줬지만, 우리는 차에 의존하면서 삶의 자유와 풍요로움을 포기해버렸다"며 자동차 문명을 비판했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 인근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카 셰어링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 조합의 창립자이자 대표이다.

_ 보봉 설계에 참여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시청 공무원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공무원들은 보봉을 차 없는 주택지로 만들면 토지 분양에 차질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토지 판매 광고를 내자 정원의 3~4배에 이르는 지원자가 몰렸다. 차로 인한 폐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_ 차를 줄이는 문제는 왜 중요한가.

"예컨대 프라이부르크 역 앞에 조성된 지하 주차장은 땅값과 건설비용이 한 자리당 7만 유로에 이른다. 차가 없는 사람까지 포함해 우리가 낸 세금에서 그 막대한 돈이 나가는 것이다. 1시간에 1유로씩 내고 그곳에 차를 세우는 사람도 부담되기는 마찬가지다. 시에서는 전철, 버스를 확충할 예산이 없다고 하지만 그 돈은 자동차를 위해 도로와 주차장을 만들고 보수하는 비용보다 싸다."

_ 차를 줄여서 보봉이 거두는 결실은 무엇인가.

"우선 이웃 관계가 돈독해진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효과다. 차가 점령했던 도로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눈다. 차 때문에 지출되던 비용도 확연히 줄어든다. 기름값은 물론이고, 공해를 줄이거나 차로를 넓히기 위해 내야 하던 세금이 절약되는 것이다."

_ 카 셰어링의 선구자로 알고 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자동차 회사에 가서 차 3대를 주문했다. 직원이 미심쩍은 눈으로 어디에 쓸거냐고 묻길래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줄 것이다'라고 하니까 '제 정신이냐'고 하더라.(웃음) 하지만 이제는 멀리 베를린에서도 우리가 대여하는 차를 쓸 수 있다. 보봉에는 20~25대가 늘 배치돼 있다. 개인 350유로, 가족 600유로의 보증금과 주행거리에 따른 저렴한 비용만 내면 기름값, 자동차세, 보험료 안 들이고 언제든 차를 쓸 수 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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