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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연구현장을 가다/ <상> 미국서 모험연구 하는 한인들

입력
2010.11.2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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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을 감수할수록 기대할 수 있는 수익도 크다는 뜻이다. 주식시장의 이 불문율이 최근 과학계로 넘어왔다. 누구도 하지 않은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아이디어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실패 위험이 크지만 일단 성공하면 영향력은 막강하다. 미국과 한국의 모험연구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시속 10km가 채 안 된다. 지금까지 나온 다리 달린 로봇이 뛸 수 있는 최대 속도가 이 정도다. 웬만한 사람이 경보로 금새 따라잡을 만하다. 30여 년 전부터 많은 과학자가 연구에 매달려온 걸 감안하면 이상하리만치 초라한 성적이다. 벌써 몇 년 째 여기서 정체 상태다.

미국 국방부(DOD)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이 정체를 풀기 위해 한 연구팀의 색다른 아이디어에 4년간 거금을 투자하기로 했다. 기존 기술이 해결 못한 문제를 풀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바로 모험이다.

치타만큼 빠른 로봇

김상배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교수팀은 로봇회사 보스턴 다이나믹스와 함께 네 발 달린 ‘치타 로봇’을 만든다. 달리는 속도를 시속 50km까지 끌어 올리는 게 목표다. 치타나 그레이하운드, 사자, 토끼 같은 동물이 빨리 달리는 비법을 알아내 로봇에 적용시킨다는 계획이다. 김 교수는 “시속 약 60km로 달리는 치타나 그레이하운드보다 10배는 무거운 사자와 호랑이, 다리가 훨씬 짧은 토끼가 더 빠르다”며 “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런 현상은 아마 몸 구조나 유전자 등의 차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 차이에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있는 원리가 숨어 있을 거라는 추측이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물의 움직임을 관찰하기도, 생물학적 원리를 기계공학적으로 적용하기도 쉽지 않다. 오래 걸리거나 실패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 아이디어에 연간 8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해달라는 김 교수팀의 제안을 DARPA가 최근 받아들였다. DARPA는 지금 있는 기술들만 조합해선 사람보다 빨리 뛰는 로봇을 만들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원 시기는 2011년 2월쯤부터고, 구체적인 금액은 아직 조정 중이다. 김 교수는 “적어도 15년 이후를 내다보는 투자”라며 “미국과 한국 아카데미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했다.

DARPA는 이 같은 모험연구에 연간 약 7조원을 투자한다. DARPA 말고도 미국에는 고위험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곳이 여럿 있다. 국립과학재단(NSF)과 국립보건원(NIH),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 등이 대표적이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실험을 제안하는 과학자에게 과감하게 연구비를 지원한다.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논문이나 특허가 얼마나 나올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이는 미국 과학계에 꾸준히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꿈 같은 기술이 현실로

유승식 하버드의대 방사선과 교수팀은 꿈 같은 기술을 연구한다. 손 대지 않고 외부에서 뇌 기능을 조절하는 것이다. 주위 연구자들 대부분 처음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쥐나 원숭이의 뇌에 컴퓨터와 연결된 전극을 삽입해 전기신호를 읽어 행동을 조절하는 실험은 지금까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수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용화하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유 교수는 전극 대신 초음파라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토끼 뇌의 운동피질에 초음파를 가했더니 위치나 세기에 따라 다리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간질 때문에 발을 떠는 쥐의 뇌 시상하부에 초음파를 쏘자 떨림이 멈췄다. 비용은 CIMIT(의학과 혁신기술 통합센터·DOD와 DARPA가 운영)에서 지원받았다. CIMIT의 모험연구 지원은 보통 1~2년간 1억1,000만원 규모다. 유 교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연구를 존중하는 풍토 덕분에 가능했던 실험”이라며 “미국에선 정부와 기관, 개인재단이 주는 연구비를 합하면 전체의 약 40%가 모험연구에 투자되고 있다”고 말했다.

NIH는 모험연구를 권장하는 걸로 유명하다. 국가기관인 만큼 대학이나 민간연구소에서 하기 어려운 하이 리스크 실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방침이다. NIH가 외부 과학자들에게 지원하는 연구비 중에도 모험연구에만 투자하는 항목들이 따로 있다. 외부 연구비를 심사하는 송민경 NIH 국립암연구소 프로그램 디렉터는 “질병이나 신약 연구는 특히 동물실험에서 사람 임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90% 이상 실패한다”며 “위험은 높지만 반드시 필요한 이같은 연구에 NIH가 최근 집중 지원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가장 작은 지원 규모가 2년간 연 약 2억7,500만원이다.

미국엔 모험연구를 지원하는 개인재단도 많다. 예를 들어 골드 허쉬 재단은 3차원 프린터를 이용해 세포를 조직으로 만드는 유 교수팀의 혁신적인 실험에 최근 약 5,500만원을 지원했다. 유 교수팀은 성체줄기세포를 3차원 프린터에 넣고 대량으로 찍어낸 다음 뼈로 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5년간 논문 없어도 무관

HHMI는 2006년 아예 워싱턴 근교에 하이 리스크 연구 전용 분원을 세웠다. 이름은 지명을 딴 자넬리아 팜 리서치 캠퍼스. 여기 과학자들은 외부에서 연구비를 따올 필요가 없다. 들어올 때 자기 아이디어와 계획한 실험에 대해 5년 간 무조건적인 예산 지원을 약속 받기 때문이다.

자넬리아 팜 리서치 캠퍼스에서 일하는 한인 2세 앨버트 리 연구원은 쥐 뇌세포에 유리전극을 대고 전기신호를 측정하는 기술을 연구한다. 쥐에서 뇌를 분리한 다음 세포만 떼어 현미경에 놓고 신호를 측정하는 건 이미 가능하다. 유럽에서 처음 개발돼 노벨상까지 받은 기술이다. 리 연구원은 이를 살아 움직이는 쥐에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진동. 쥐가 움직일 때마다 유리전극이 민감하게 흔들리면서 신호가 자꾸 사라졌다.

리 박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과에서 충치를 메울 때 사용하는 물질을 유리전극 주변에 뿌려 고정시켰다. 리 박사는 “움직이는 생물에서 이 기술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며 “다른 연구자도 쓸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개선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기술이 확립되면 기억력이나 운동을 조절하는 뇌세포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 모험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은 논문이나 특허 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곳에서도 ‘양적인 성과’를 강요하지 않는다. 얼마나 창의적인 시도였는지,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워싱턴ㆍ보스턴=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인터뷰/ 루빈 자넬리아 팜 리서치 캠퍼스 소장

“우리는 연구자의 과거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봅니다. 전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일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뭘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연구자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에 모험을 거는 거죠.”

제럴드 루빈 자넬리아(사진) 팜 리서치 캠퍼스 소장의 ‘리크루팅 철학’이다. 자넬리아 팜 리서치 캠퍼스는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가 모험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2006년 워싱턴 근교에 세운 분원.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원하는 과학자를 데려다 1년에 5억~20억원의 연구비를 5년 동안 지원한다. 논문이나 특허, 안 나와도 된다.

“연구자의 성실성을 믿는 거에요.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5년 추가 지원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이디어를 단념하겠다는 연구자도 2년 정도는 지원을 연장해주죠. 다른 일자리를 찾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획기적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다. HHMI라는 든든한 모(母)기관이 매년 990억원을 투자하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모기관이 의학 분야지만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 공학 전문가도 합류한다. 이들이 의학자나 생명과학자와 만나면 훨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기업에서 모험적이고 성공률 낮은 연구, 오래 걸리는 연구를 많이 지원했어요. 하지만 점점 어려워졌죠. 그래서 우리가 나선 거에요. 이런 연구만 한 곳에 모아 효율적으로 해보자는 새로운 시도죠. 다른 연구기관이나 대학처럼 비용처리나 강의 등 외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는 겁니다.”

기대는 20년 뒤로 미뤘다. 자넬리아 팜 리서치 캠퍼스를 만든 게 잘한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때 가서 판단하겠다는 얘기다. 루빈 소장은 원래 유전학자다. 하지만 소장에 취임한 뒤부터 심리학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창의적이고 개성 강한 연구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자칫 실험실 간 벽이 생길 수 있어요. 이들을 모아 토론하고 협력하도록 만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소장으로서의 임무이기도 하고요. 유전학보다 심리학을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네요(웃음).”

루빈 소장의 아이디어는 연구자별 실험실을 6~7명 규모로 작게 운영하도록 하는 것. 각자 실험실에서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지금까진 일단 성공적이라고 루빈 소장은 보고 있다.

“과학은 상상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야 해요. 모험연구가 바로 그런 과학입니다.”

워싱턴=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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