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 정국을 뒤흔든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22일 증거인멸 부분에 대한 1심 법원의 판단과 함께, 일단 법적인 의미에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윗선 개입' 의혹이 명쾌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청와대의 불법사찰 개입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 여진(餘震)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실체적 진실 규명의 관점에선 여전히 미흡해 재수사의 불씨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 5일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두 달 간의 수사를 통해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 4명을 기업인 김종익씨와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 등 3명을 증거인멸 혐의로 각각 기소했다.
수사 초기부터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나 박영준 지식경제부 제2차관, 이명박 대통령과 동향 출신 공직자들의 모임인 '영포목우회' 등이 이 사건의 '몸통'으로 거론됐지만, 검찰은 이 전 지원관의 '윗선'을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를 마무리했다.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검찰은 "증거 인멸로 더 이상의 수사가 불가능했다"는 변명만 거듭했다. "불상(不詳ㆍ자세히 알 수 없음)의 경위로 민간인 사찰이 시작됐다"는 허무한 결론뿐이었다.
그러나 국정감사와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은 'BH 하명' 문건의 존재, 청와대 행정관의 대포폰 제공 등을 잇따라 폭로하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다 살펴봤던 내용들"이라며 의미를 축소했지만, 일부 여당 의원들조차 재수사의 필요성에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의혹 제기가 이어질 경우 정권 차원의 부담이 커질 수 있어, 특검 도입이나 국정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애초 무혐의 처리됐던 '그랜저 검사' 사건에 대해 검찰이 최근 특임검사를 임명해 재수사에 나선 점에 주목할 만하다. "새로운 단서가 나오면 재수사하겠다"던 검찰이 돌연 자체 감찰 결과만으로 재수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도 검찰이 재수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원관실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롯, 다른 여권 인사와 YTN, 민주노총 등을 사찰했던 정황도 새로 드러났다. 검찰이 확보한 원충연 전 점검1팀 사무관의 수첩에는 오 시장과 관련해 '서울시장 대선활동 관련 부서 만듦(이미지관리)→지난번 인사 때 직원 발령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친박계인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에 대해선 '(건강보험)징수공단 통합안 발의, 이혜훈은 전 정부시절에도 찬성'이라고 기재돼 있고, 2008년 YTN 파업사태 당시 노조의 동향을 파악한 내용도 담겨 있다. 게다가 동향 파악 내용을 청와대와 국정원, 경찰청 등에 보고했다고 짐작할 만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지원관실이 전방위적으로 무차별 사찰을 진행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인사의 이름도 원씨 수첩에 담겨 있어 참여정부 주변인사들에 대한 표적사찰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수첩에는 유 전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이시우씨의 이름과 함께 '비자금 조성 부분' '불법 폭력집회의 배후자금 지원화 첩보' 등이 적혀 있다. 이씨는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자활센터 사무처장으로 근무 중이다.
이밖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조직적으로 총리실이 사찰 관련 증거를 인멸한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법원은 이날 판결문에서 "주말인 7월3일과 4일에도 지원관실 직원들이 출근해 불필요하거나 민감한 문서들을 폐기하고 파일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지원관실이 단순히 민간인 김종익씨 사건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를 감추려 했거나, 누군가를 보호하려 했음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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