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5월 10일 경기지부 계엄 고등군법회의의 첫 공판이 열렸다. 전 내무부 장관이던 김치열 변호사가 무죄 주장을 펼쳤지만 군 검찰은 이목우 부장에게 불구속, 최병욱 편집위원에게 징역 8월, 그리고 나에게는 무려 징역 3년을 구형했다.
"피고는 강화도 현지 사건이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근 파출소나 헌병대에 알려서 사건을 무마함이 옳은 줄로 아는데 기자라는 신분의 영웅심리가 작용해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고무, 찬양하였으므로 징역 3년을 구형한다." 실로 어처구니없이 뭔가 커다란 수렁에 빠진 것만 같았다. 비틀거리며 감방에 돌아오니 구형은 원래 그런 거라며 다들 별거 아니라고 위로를 했다. 동료들끼리 모의 재판을 하며 선고 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정도 받을 것이라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닷새 후인 5월 15일. 지금의 경기도청 강당인 경기고등군법회의 법정에 들어서자 법정 구석에 초조하게 앉아있는 아내와 한국일보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선고의 순간. 하얀 홑바지에 저고리를 입은 나는 이제 밖으로 나간다는 기다림에 눈을 감고 기다렸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귀를 때렸다.
"피고 정범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합니다!" 재판장의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절망에 사로잡혔다. 군사재판은 단심이었으므로 실형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목우 사회부장과 최병욱 편집위원에게는 공소기각이 선고됐다. 권력 앞에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다음날, 기결수의 신분이 돼 서대문교도소 상층 1호실 조그마한 독방으로 이감됐다. 상층은 5.16이전 이승만 정권에서 한자리씩 하며 한때 내로라 했던 자유당 각료들이 몰려 있었고 아래층엔 민주당 관계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층은 전 내무장관이었던 이익흥과 홍진기, 전 치안국장 이강학, 그리고 전 국회부의장 이재학 등이 수감되어 있었고 아래층엔 송지영, 고정훈, 양국진 등 언론인과 민주당 각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회에서 원수처럼 지내던 이들이 지층을 두고 서로 손을 흔들며 건강을 당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정치의 비정함과 인생의 무상함이 새삼 느껴졌다.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서삼경과 삼국유사, 괴테와 슈바이처의 문학 전집 등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 나갔다.
8월에 마포교도소로 이감돼 감방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함께 수감 중이던 헌병대 대령출신 정원상씨가 숨가쁘게 찾아와 귓속말을 건넸다. "정기자! 너희 왕초가 여기 들어왔다." 정원상은 군 정보기관의 책임자로 있다가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다. 반혁명사건이란 5.16후 국가재건회의 의장을 맡은 장도영중장이 부의장이면서 5.16의 실질적 주동자였던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거꾸로 당한 혁명세력 내부의 반란사건이었다.
"우리 왕초가 무슨 일로..." "아직은 잘 모르겠어..." 당시 한국일보 기자들은 창간사주인 장기영사장을 왕초라고 불렀었다. 장기영사장의 구속 사유는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5.16 이후 당시 혁명정부의 정책과 노선이 국내외 초미의 관심사항일 때 한국일보 정치부 한남희기자가 정확하지 않은 뉴스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성급하게 판단, 기사화해 화를 부른 것이다. 1962년 11월 29일 한국일보 1면 톱기사로 '신당 사회노동당(가칭)으로 정강 정책초안 완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민정에 집단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혁명주체세력과 그 동조자들이 모체가 될 이른바 신당의 명칭은 가칭 '사회노동당'으로 내정하고 발기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27일 알려진 바 그 동안 정강 정책은 후진성을 탈피한 진보적인 것으로 해야 하므로 당명도 그것을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사회노동당'으로 내정했으며 당명에 뚜렷하게 국가 목표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상당히 부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내용의 조간신문이 시중에 깔리자 서울 장안은 난리가 났다. 그날 밤 장기영사장이 전격적으로 구속되고 한국일보는 3일간 정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은 29일 "한국일보 사장 겸 편집국장 장기영씨, 편집국 부국장 홍유선씨, 정치부장 김자환씨, 정치부기자 한남희씨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1호, 특정범죄 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3조 3항 등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 문초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필화사건으로 번진 한국일보는 12월 1일, 3일 간의 휴간사를 내고 5일 재발행에 들어갔고 장기영 사장의 퇴임으로 남궁련 사장 겸 발행인이 취임했다.
왕초가 병동 감방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정원상씨의 수완을 통해 면회를 갔더니 장기영사장이 흰 한복 차림으로 방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왕초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마치 우리에 갇힌 한 마리 곰과 같았다. "사장님, 저 정범태입니다." "어, 자넨가! 여기서 고생이 많구먼. 몸조심하게." 장사장은 퇴임 후 구속이 해제되어 출감하자 12월부터 월급을 집과 교도소 두 곳에 이중으로 보내줬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외모와 달리 사원들의 고충을 헤아렸지만 자신이 구속되어보니 이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도 느꼈던 것 같다.
해가 바뀌어 봄 볕이 찾아 온 어느 날, 교도관이 갑자기 사물을 챙기라고 해서 또 다른 곳으로 이감을 시키는 줄 알았다. '이제 이곳에도 재미를 좀 붙였는데 또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났다. 그런데 교도관의 말. "고생 많았어요. 오늘 출감입니다." 1963년 4월 16일 드디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전등사 보도가 나간 지 1년, 그리고 구속된 지 362일 만의 일이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사물 보따리를 챙겨 교도소 문을 나서니 어디선가 비치는 카메라 플래시의 불빛이 눈이 부시게 했다. 한국일보 사진부 최정민기자였다.
환히 웃는 최기자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신문사 지프를 타고 한국일보로 향했다. 다시 사장에 복귀한 장기영사장에게 큰 소리로 복귀 신고를 했다. "잘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당신은 역시 큰 기자야. 며칠 쉬며 몸조리하고 마음 놓고 일하도록 해요." 나는 다음날 빡빡 깎은 머리를 한 채 출근을 했다. 쉴 틈 없이 바로 '사진기자 정범태'로 복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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