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수는 그 체급(여자태권도 -49kg급)에 출전하지도 않았다. 주심은 필리핀, 부심 3명도 중국 쿠웨이트 타지키스탄인이었고, 경기감독위원장 또한 중국, 심판위원장은 싱가포르인이었다. 그런데 대만인들은 아시아태권도연맹 부회장이 경기를 중단시킨 장본인이라며 그가 한국계 필리핀인임을 문제 삼았다. 자기네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실격패한 뒤 중국선수가 우승하자 이번엔 한ㆍ중 밀약설을 들고 나왔다. 더 기막힌 건 이 황당한 음모론의 한 당사자이자 최대 '수혜자'인 중국엔 정작 별 얘기도 못한 채 그저 한국 욕하기에 광분하는 모습이다.
■ 물론 경기 운영은 대단히 미숙했다. 경기 전 두 차례 검사에서도 양 선수의 발꿈치 센서를 적발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돌연 실격패를 선언한 대목이다. 그것도 양 선수가 압도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으니 대만인들의 감정이 순간 격앙될 만도 했다. 공정하자면 추후 경기위원들에게도 응당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의 표출 강도와 방향이다. 국기모독까지 당할 정도로 한국이 욕을 먹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제 허물 탓하기 잘하는 '착한' 한국인들은 1992년 대만 단교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애써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 하지만 대만과의 단교는 한국이 가장 늦은 편이다. 대만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1위로 매번 꼽는 일본은 그보다 20년 전에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한국, 너마저…"하는 배신감은 컸겠지만 당시 한국이 냉정하게 대만외교관들을 내쫓았다는 일반의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 1주일 전에 중국과의 수교사실을 알려 형식상 대만 측이 먼저 단교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등 도리어 다른 나라들보다 여러 모로 배려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이미 88서울올림픽 때부터 반한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걸 돌이켜보면 본질적 이유는 단교가 아니다.
■ 한 수 아래로 여겼던 한국이 무섭게 질주, 어느 틈에 경제 문화 외교 등 국력의 전 분야에서 멀찌감치 앞서나가고 있는 데 대한 질시의 감정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특히 반도체 컴퓨터 등 IT산업이 한국에 밀려 성장동력을 상실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공자ㆍ한문 한국기원설' 따위의 유치한 날조로 장난치는 대중이야 그렇다쳐도 정치지도자, 외교관, 언론인들까지 앞장서 선동해대는 모습은 기막히다. 한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성장모델이기도 했던 대만의 국격 추락에 화보다는 연민이 앞선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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