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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민족을 잊고 싶다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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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민족을 잊고 싶다는 시인

입력
2010.11.2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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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통일만 되면 내 나라를 떠나 민족을 잊고 싶다. 지긋지긋하다. 조속히 분단이 끝나길 바란다."

하고한 날 남북한이 싸워대는 모습이 아주 지겹거나, 한국 사회 안에서도 보수니 진보니로 날을 지새는 꼬락서니가 정말 역겨운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의 말이라면 그 심정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이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한국어로 쓴 시로 몇년째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돼온 고은 시인의 말이라면, 좀 달리 들린다.

그는 며칠 전 고향 군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말을 했다 한다. 그 소식을 전한 뉴스가 앞뒤 상황은 거두절미하고 이 말만 옮기고 있어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이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뱉었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시인으로서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그는 2005년부터 진행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최근 남북관계 악화로 사전 편찬사업에 대한 지원이 끊기자 그는 "남은 생애를 걸고 추진해온 남북 통합 국어사전 편찬사업"이라며 정부에 예산 집행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의 나이 77세이니 식민과 전쟁과 분단 상황 속에서 평생을 보냈고 아직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와 민족에서 살아야 하는 한 자연인 노년의 진짜 피로감, 지긋지긋한 심정의 직설적 토로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 나라를 떠나 민족을 잊고 싶다"는 그의 말을 타매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분단,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삶은 기실 한국문학에는 축복의 요소이기도 했다.고은 시인의 시를 비롯해서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 현대문학의 수작들은 분단이라는 상황을 모태로 해서 비로소 태어날 수 있었다. 얼마 전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한 '세계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서 최인훈의 소설 (1960)과 김영하의 소설 (2006)을 각각 1950~60년대와 1990~2000년대 한국적 상황의 본질을 가장 잘 파악하고 드러낸 소설로 꼽았다. 무려 46년의 시차가 있지만 두 소설 모두 분단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알다시피 최인훈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행을, 결국은 자살을 택한다. 고은 시인의 "민족을 잊고 싶다"는 말이 겹쳐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 김기영. 1963년 평양 출생으로 1984년 남파된 고정간첩인 그는 신자유주의 남한 사회에 젖어 자신이 간첩인 줄도 거의 잊어버린 채 전형적인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북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어쩌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분단 상황을 호흡하면서 민족 혹은 이념이라는 것은 저기 남의 일로 치부하고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세대의 표상일지 모른다. 소설의 그런 설정이 오히려 분단 상황을 더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은 최근 미국에서 번역출간돼 인터넷서점 아마존 순위에도 오르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번역본 표지를 보는 기분은 묘하다. 위에는 북한 인공기의 붉은 별이 눈동자에 박힌 눈 한 개, 아래에는 남한 태극기의 태극 문양이 눈동자에 박힌 눈 한 개가 각각 그려져 있다. 세상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이념의 분단 국가로, 각각 외눈박이로 갈라져 살아가는 민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다. 가운데로 소설의 영문 제목이 큼지막하게 씌어 있다. 'YOUR REPUBLIC IS CALLING YOU', '너의 공화국이 너를 부르고 있다'. 오늘 아침 신문도 한반도, 우라늄, 도발, 전술핵 같은 단어들이 도배하고 있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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