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어느 토요일 밤의 한 호텔. 66개 방 안의 풍경들이 유리창을 통해 펼쳐진다. 혼자 술을 마시는 남자, 상처투성이 얼굴로 외출 준비를 하는 여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누운 중년 남녀, 기계적인 섹스를 하는 사람들, 자살이나 살인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까지. 하나같이 외롭고 절망적이다.
서울 서소문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재독 사진작가 김인숙(41)씨의 개인전 ‘위대한 거울’맨 앞에 걸린 작품 ‘토요일 밤’을 보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가로 4.6m, 세로 3m의 커다란 사진 속에 각기 다른 은밀한 이야기가 66편이나 들어 있기 때문이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사진을 공부한 김씨는 우연히 학교 근처의 한 호텔 유리창에서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봤다고 한다. 그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시간적 여유는 점점 많아지는데, 그 시간 때문에 사람들은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치 신문에서 외로움이나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을 고르고, 그 사건들을 스튜디오에서 재현해 촬영한 뒤 호텔 전경 사진과 합성했다. 66개의 장면들을 영화를 찍듯 치밀한 계획과 연출로 만들어냈기에 작품 완성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김씨의 남편, 옆집 아저씨, 치과 의사, 담배가게 주인 등 주위 사람들이 모델로 출연했다. 발 밑에 소지품을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목을 매단 완벽주의자 역할은 김씨가 직접 맡았다. 그는 “아무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했다”며 웃었다.
김씨의 제1회 일우사진상 수상을 기념해 열린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사진 속의 수많은 유리창들이다. 슈투트가르트 미술관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랑엔 재단 미술관의 관람객들, 둥글게 휘감아 올라가는 뉴욕 블룸버그 빌딩 등 여러 사진에서 투명한 유리로 외관을 두른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유리 건축물들을 보고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섯 겹씩 문을 걸어 잠그고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어하면서 유리창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는 뭘까, 갇혀 있다는 느낌과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를 두고 건축물 사진을 찍는 작가라고들 하는데,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리창 작업의 시작이 된 2005년 작품 ‘저녁식사’는 그의 또 다른 관심사인 여성의 성 상품화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둘러 앉은 긴 테이블 위에 옷을 벗은 여성들이 음식처럼 펼쳐져 있고, 창 밖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독일 법정에서 촬영한 작품 ‘경매’는 좌대 위에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금발의 여성을 향해 수십 명의 남자들이 입찰하는 장면을 연출해 찍은 작품이다.
한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김씨는 10년 전 독일로 건너가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10년 만에 국제적 주목을 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그간 그룹 전시를 통해 종종 국내에 작품을 선보이기는 했지만, 개인전은 처음이다. 무작위로 촬영한 여성들의 뒷모습을 통해 개인이 정체성 문제를 다룬 초기작 ‘이름없는 얼굴’ 시리즈, 헤로인과 LSD 등 마약을 모티프로 현대인들의 세태를 담아낸 최근작 ‘마약’ 시리즈 등이 두루 걸렸다.
전시장 입구에는 ‘13세 미만 어린이는 보호자와 동반해야 입장할 수 있다’고 적힌 안내판이 놓여 있다. 실제로 그의 사진 중에는 외설처럼 보이는 것들도 꽤 많다. 왜 이렇게 강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찍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게 다 다 우리 주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전시는 내년 1월 9일까지. (02)753-6502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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