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왜소할 때 외교는 커진다.'미국의 오래된 정치 속설이다. 대통령이 국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수세에 몰릴 때 으레 외교로 난국을 타개해온 관행을 빗댄 말이다.
난국 타개용 외교도 허탕
실제 중요한 선거에 패했거나 스캔들에 직면한 역대 대통령들은 어김없이 미국 밖으로 탈출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상ㆍ하원을 내준 뒤 아시아 외유에 나섰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는 10일간이나 아프리카에 머물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2006년 중간선거에 패하자 아시아 순방에 올랐고, 임기 막바지 인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도피성 외교를 벌였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권의 명운이 흔들리던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이집트에 있었다.
미 대통령들이 국내 위기에서 하나같이 '밖으로'를 택한 것은 초강대국 지도자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얻은 점수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달 초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지 3일 뒤 아시아 순방에 나선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뒷수습이 급한 마당에 외유에 나서는 것은 무책임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일본의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이미 오래 전 확정된 대형 외교행사들이어서 정치적 공세에 가까웠다. 정작 문제는 오바마 대통령이 외국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울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쟁점 타결에 실패했고, 환율 문제에선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돼버렸다. 중국을 몰아붙이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유럽과 브라질 등으로부터 달러 약세 정책 등에 대한 비난 공세에 직면했다. 중국 견제의 지렛대로 삼아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에서는 대 파키스탄 원조 때문에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이 상대국 지도자와 입씨름만 벌이다 빈 손으로 돌아온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때 '중국 위협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중국의 위협을 과도하게 부풀려 주변국이나 동맹국을 상대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정치논리였다. 그런데 이제 중국이 정말로 위협적인 경쟁국으로 등장, 미국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움직이던 국제질서가 복잡하게 꼬이고 있다. 중국의 위협을 강조해 이익을 챙긴 미국으로서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국 부상으로 입지 좁아져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노골적 군사대국화에 불안해하면서도 경제에서는 점점 중국과 밀착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 자산인'안보우산'도 중국의 '경제우산'앞에 빛이 바래는 형국이다. 안보우산이 언제까지 유용할 지도 의문이다. 미국은 지금 국방예산 감축, 아프가니스탄 조기 철군, 핵군축 등에 여념이 없다. 미국 언론은 "9월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영토분쟁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역내 중재자 역할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며 "중국이 고압적으로 나오는 것은 이를 간파한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중국과 대만 간 미사일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이 항모까지 파견했던 미국의 '굴기(屈起)'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노릇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안팎 곱사등이 신세가 된 오바마 대통령은 정말 '단임'을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황유석 워싱턴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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