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벌이 사라지고 있다. 6~7월 강원지역에서 토종벌이 하나 둘씩 폐사하기 시작하더니 7~9월 본격적인 떼죽음으로 이어졌다. 전국 토종벌 농가 비상 대책위에서 추산하는 토종벌 폐사율은 98%, 전국 피해액은 2,700억원 규모다.
원인은 농민들 사이에서 '토종벌 괴질'이라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의 확산이다. 토종벌의 몸 안에 머무르던 바이러스가 애벌레인 유충(幼蟲)에게 옮겨져 감염되는 병이다. 감염되면 벌의 몸집이 점차 굳어지다 말라 죽는다. 최근에는 양봉(洋蜂)에도 피해가 미치고 있다.
토종벌을 키워 생계를 이어오던 농민들은 대책을 요구하다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하자 결국 국회를 찾았다.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뒤편 여의서로를 찾은 전국 토종벌 농가 비상 대책위 소속 노인 180여명이 확성기를 잡고 구구절절 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석규(95)씨는 "34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 강원 화천군에서 키우던 벌 1,400여군(벌통)이 모두 말라 죽었다"고 했다. 벌 유충이 벌통 안에서 그대로 폐사하는 통에 수천만원을 들여 장만한 벌통과 자재까지 내다 버렸다. 충북 청주시에서 김씨 아들이 키우는 700여군도 같은 피해를 당했다. 전남 화순군에서 20년간 토종벌을 키워온 윤동오(55)씨는 "피해액이 수억원이다. 전염병 확산으로 내년 농사를 또 짓는다 해도 답이 없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토종벌의 최초 감염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8월부터 실시한 전국농가실태조사를 통해 "올 봄 이상저온 현상으로 전국 토종벌의 면역력이 약화했고, 이로 인해 낭충봉아부패병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를 내놨다. 그 사이 토종벌의 폐사 행렬은 강원 지역에서 멈추지 않고 7월 영남, 8월 호남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사태가 악화하자 농림수산식품부에서 9월 방역, 240억원 규모의 저금리 융자, 기술교육비 지원, 법정가축전염병 지정을 통한 방역체계 구축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농민에게는 방역할 벌통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저금리 융자 형태의 긴급경영안정자금도 그림의 떡이다. 이만영 전국 토종벌 농가 비상 대책위원장은 "이미 대출을 받아 시설을 구비한 농민이 대부분이어서 새로 빚을 얻을 자격도 안 된다"고 했다. 실제 강원 전체 지역에서 농민들이 받은 저금리 융자는 총 1억7,000여 만원에 불과하다.
올해 피해액은 보상받을 방법도 없다. 벌의 집단폐사가 자연재해대책법상 재해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태풍 풍수 혹한 등의 현상으로 가축이 떠내려가거나 동사한다면 자연재해로 인정받아 피해액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지만 토종벌 폐사는 이상저온이 '간접적인' 역할만 했기 때문에 자연재해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농림부 방침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안타깝지만 간접적 피해에 예외를 적용하면 전체 보상 기준을 흔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날 농민들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소속 의원실과 청와대 민원실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글ㆍ사진=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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