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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8> 금동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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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8> 금동반가사유상

입력
2010.11.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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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으로의 이전 개관 5주년을 맞아 전시된 문화재 가운데 대표 명품 20점을 선정했다고 지난 10월 28일 발표했다. 아울러 지난 11일~12일 G20정상회의 첫날 만찬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해 세계 여러 나라 정상들에게 한국문화의 정수를 선보였다.

이 대표 문화재 가운데 불상은 금동반가사유상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상입상, 감산사아미타석불입상 등 3점이었다. 선정된 문화재가 각기 대표명품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국보 제83호로서 뛰어난 조형미와 종교적 사유를 통해 정상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빼앗았다고 알려진 뛰어난 명품이다.

반가사유상이란 말을 풀어보면,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다리를 왼다리 허벅지에 올려놓고, 오른손 팔꿈치는 책상다리에 놓고 손가락 하나를 오른쪽 뺨에 살짝 갖다 붙이면서 눈은 아래로 깔아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을 말한다. 머리에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다고 해서 이를 삼산관이라고도 부르고 한편으론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키가 커서, 높이가 93.5cm에 이른다.

이 반가사유상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일반에 전시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아서, 일제강점기부터 경주지역이란 주장과 충청지역이란 두 견해가 맞섰다. 이 불상은 일본인 골동상 가지야마(楣山義英)란 자가 1909년 창경궁에 개관된 이왕가박물관에 1912년 팔아 넘겼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없어진 이왕가박물관이 건립된 것은 일본의 꿍꿍이가 있었겠지만 최초 개관하면서는 궁내부 소속이었다. 그래서 일명 궁내부박물관이라고도 불렸다. 가지야마가 이왕가박물관에 이 불상을 팔았지만 그 출처가 어느 절터에서 도굴한 것이거나 도난품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에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반가상이 이왕가박물관에 입수된 후 이를 본 일본인 아사가와(淺川伯敎)는 회고에서 불상의 당시 상태를 얘기하고 있다. ‘불상 표면에 호분을 두텁게 칠했고 얼굴은 먹으로 그렸는데 눈 꼬리가 쳐지고 꼬불꼬불한 수염에 까만 눈동자를 그려 넣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 보기 흉했는데 더운 물로 닦아낸 후 본 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계룡산에 머물면서 조선의 불교문화를 연구하고 있던 이네다(稻田春水)가 1915년 발표한 글에서 이 불상에 대해, ‘최초의 소재지는 충청도 벽촌인데 1910년에 서울로 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광복 후에도 불상연구자 사이에 논란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두 주장 가운데 백제지역 출토로 가닥을 잡았다. 그것은 일본에 남아있는 반가상이나 우리문화를 일본에 전한 기록이 신라보다 백제가 많아 자연스럽게 백제불상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고 있고 심지어 고구려불상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있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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