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생존을 위한 정보를 나누던 이야기들은 점점 생존의 의미를 묻는 역할로 바뀌어 갔다. 말을 만들고, 글을 만들고 노래를 만들었다. 활자로 책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진화의 끝에서 트위터가 나타났다.
원고지의 200 자적 사고는 A4 용지의 10 폰트, 2,000 자적 사고로 확장됐다가, 트위터의 140 자로 줄어들었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아이들이 더 이상 채울 말이 없어 머뭇거리던 칸의 위치였다. 다시 말하면 거기까지는 누구나 쓸 수 있었다.
자기 노출증과 대화 본성
자기 노출증은 본성이었다. 외로움은 죄악이 아니었다. 인간은 본성 속에서 이미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중계함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생이라는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었다. 혼자일 때도 주목되는 영화 주인공처럼.
일기는 불특정한 미래에 누군가에게 읽힐 것을 예상하고 쓰는 것이고, 트위터는 쓰는 순간 불특정 다수에게 읽힐 것을 예상하고 쓰는 것이다. 일기는 독백이고, 트위터는 대화다. 존재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매체를 갖게 됐다. 유명 소설가와 독자가, 유명 연예인과 팬들이 트위터에서 만난다. 프로와 아마츄어의 경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트위터 세상에서 정보든, 신념이든, 감성이든 가치 있는 글을 쓴다면 누구나 프로가 될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는 트위터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교우의 시작은 맞팔이고, 베스트 프렌드는 리스트 등록이다. 피하는 건 언팔이고, 절교는 블록이다. 인사는 답장이고, 존경은 리트윗이고, 정체성은 손톱만한 사진과 몇 줄의 프로필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어도 그가 어제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갔었고, 무엇을 했는지는 다 안다.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느 당을 지지하고,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도 안다. 하루 200번 대화를 한다면, 이미 트윗 친구는 가족보다 가깝다.
팔로잉(Following)은 스스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명단이고, 팔로워(Follower)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명단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는 팔로잉을 보면 알 수 있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팔로워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트위터 세상에서는 진보적 정치 담론이 주류다. 그것은 이 매체의 민주성, 탈권위성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또한 이 매체의 젊은 나이와도 관계가 있다. 보수란 결국 오래된 것을 지키는 것이고,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매체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밤늦은 서울의 지하철 객차 안을 그렸을 것이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은 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 사람들의 얼굴에는 호퍼 특유의 음울한 그림자가 그려졌을 것이다.
온ㆍ오프라인 경계 흐릿해
한때는 지하철의 모든 사람들은 스포츠 신문을 봤다. 반짝 나왔던 지하철 문고는 이제 사라졌다. 활자와 종이가 아닌 것을 반(反)지성이라고 얘기할 순 없다. 활자는 핸드폰 속에도 있다. 매체는 발전이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고 변해갈 뿐이다.
회식 자리에서 지루한 연설을 하는 직장 상사는 가장 확실한 트위터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말이 끝나면 밥상 밑으로 일제히 고개 숙인 부하 직원들을 볼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는 휴먼 네트워크(Human Network)를 개선한다.
트위터는 반실명(半實名)적인 동시에, 반익명(半匿名)적이다. 오프라인보다는 익명적이고, 인터넷 댓글보다는 실명적이다. 트위터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중간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이미 구분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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