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젤이라면 알브레히트가 아니라 힐라리온을 택하겠어요.”
“지젤요? 유명하지만 본 적은 없네요.”
흰 국화가 빼곡히 들어찬 무대 전면의 벽이 스크린으로 변했다. 국화 꽃잎 때문에 들쑥날쑥한 표면에 발레 ‘지젤’에 대한 시민들의 솔직한 의견이 영상으로 재생됐다.
지난 12~14일 서울 역삼동 LIG아트홀에서 열린 공연 ‘지젤_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젤’은 100년도 더 된 낭만발레의 결정판. 죽음도 불사하며 사랑을 지키는 지고지순한 이야기가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세계적인 안무가 마츠에크가 20여년 전 지젤을 정신병자로 만든 것이나, 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이 지난해 그를 창녀로 묘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용걸씨도 이런 흐름을 잇는다. 그가 안무한 이번 작품에서 지젤은 시신으로 등장했다. 알브레히트(김용걸)가 생전의 지젤(조정희 전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과 나누지 못한 육체적 관계를 시체와 맺는다는 충격적인 가정을 한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그랜드 피아노 현 위에 누워있던 지젤을 꺼내 홀로,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와 함께 2인무를 췄다. 딱딱하게 굳은 지젤은 음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무용수가 얼마나 정확한 테크닉을 보여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젤을 사랑하던 힐라리온(김한솔ㆍ한예종 현대무용과 1년)이 사실은 알브레히트를 사랑했다는 내용도 새로웠다. 동성애 코드는 흔하지만, 남자 무용수에게 분홍색 튀튀를 입힌 것은 관객의 야유를 견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지만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소극장에서 관객에게 동화될 법한데도 끝까지 무표정한 표정을 이어간 무용수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앞선 인터뷰에서 김씨는 세번째 안무작인 이번 작품을 ‘무용실험극’이라고 했다. 현대무용이라 하기에는 클래식 발레 동작이 많이 끼어들고, 작품에 대한 역발상이 극적 전개를 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뒤집어 본 면면이 신선했고, 장면은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에 깊숙이 밴 발레의 우아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됐다.
최근 김씨는 현대무용가와 협업이 잦다. 지난달 안성수씨의 ‘몸의 협주곡’에 출연했고, 이번에는 안은미씨를 연출가로 불러들였다. 무용평론가 박성혜씨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름답다”면서 “이번 작품은 절반의 성공이다. 장차 그가 만들어낼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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