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극단 창파의 '푸른 관 속에 잠긴 붉은 여인숙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병욱 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극단 창파의 '푸른 관 속에 잠긴 붉은 여인숙2'

입력
2010.11.16 12:04
0 0

극단 창파의 ‘푸른 관 속에 잠긴 붉은 여인숙2’는 각종 이미지들로 이 시대에 엄존하는 불행을 돌아다 보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상식의 뒤집기에 기대고 있다. 극중의 비극적 현실은 그래서 객석을 탈현실화시킨다.

어느 가족이 있다. 이들은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의자를 들고 각자 왈츠를 춘다. 우아함의 상징인 왈츠는 이들을 만나 장송 행진곡이 된다. 굼뜨게 움직이지만 이 공간에서 나갈 구멍을 찾거나, 헬멧에 프로펠러를 달아 돌리기까지 한다.

객석의 의식을 잡죄는 것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 가족의 행태다. 이들은 숨만 쉴 뿐, 살려는 의지가 없다. 도대체 어떤 불행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설명도 없다. 이들은 던져져 있을(彼投) 뿐이다. 남자의 말마따나 “섹스할 때의 느낌이라도” 가지고 싶을 뿐이다. 식구들의 무력함에 “발가벗겨 가스실에 처넣겠다”고도 소리쳐 보지만 그 말을 한 사람부터 의지란 것이 박탈돼 있다.

가족을 덮치는 불행은 그러나 객석에 제시될 뿐, 질문도 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 광대들은 그들이 살던 세상에서 인간세를 한번 휙 들러보고 갈 뿐이다. 지루한 일상처럼 불행이 인간들에게 눌러붙어 있을 뿐이다.

무대상의 공간은 바깥 세계와 단절돼 있다. 그같은 고립적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TV모니터 속의 세계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놓인 소형 TV모니터는 인간과는 완전히 별개의, 독립적 세상이다. 피에로 같기도 하고 저승사자를 닮은 것 같기도 한 네 명의 어릿광대들이 TV의 어린이 프로 ‘텔레토비’처럼 줄지어 종종걸음을 친다. 화면 속 광대들이 실제 무대에 나와 어느 가족의 일상에 개입하다, 다시 모니터 속으로 돌아간다는 구조다.

좀비 영화가 판치고, 철없는 아이들은 ‘시체놀이’란 걸 만들어 한다. 이럴 때 이 ‘한없이 투명하게 무기력한’ 저 이상한 가족의 존재는 객석에게 이 시대 침묵하는 약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작ㆍ연출자 채승훈씨는 “부조리한 것에는 가장 부조리한 방식으로 맞닥뜨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제작비 타령만 늘어놓는 화려한 무대에 정신이 팔린 시대, 극단적이고 표현적인 이미지들로 꾸민 가난의 무대가 서로에게서 소외된 채 사는 우리 시대를 직시하게 한다. 21일까지 혜화동1번지.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