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가 도박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10년은 지나야 해. 그때가 되면 이미 돈은 돈대로 잃고 심신도 피폐해 진 다음이지."
17일 오후 경기 과천시 청계산 자락의 공원에서 만난 황모(62)씨는 "도박의 피해는 자신에게 그치지 않고 주위 사람들, 나아가 도박 빚에 의한 각종 범죄 등 사회에 해악을 가져오는 게 더욱 큰 문제"라고 했다. 30여년을 경마에 빠져 누구보다 그 피해를 잘 아는 그는 "정부와 마사회가 말로만 레저스포츠라고 떠들게 아니라 적절한 규제를 통해 건전한 문화로 바꿔가는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경마에 첫 발을 들여놓은 때는 경마장이 서울 뚝섬에 있던 1970년대 중반. 재미 삼아 한 번 해본 경기에서 터진 '대박'이 화근이 됐다. "3, 8번 말이 윤기가 나고 활기차게 보이더라고. 만원을 걸었는데 글쎄 1, 2등으로 들어 온 거야.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 '큰 건 터졌다'고 더 놀랐지."
배당판에 찍힌 금액은 48만7,000원, 자장면 한 그릇 값이 35~4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 돈을 갖고 금성(현 LG)대리점에 가서 컬러텔레비전을 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한 마디로 그때 코가 꿰인 거지."
이후 그는 매달 대여섯 차례 경마장을 드나들었지만 행운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적게는 몇 십만원에서 100만원까지 잃기도 했다. "본전만 찾으면 그만 둬야지 했지만 그게 되나. '말밥'만 열심히 갖다 바친 꼴이지."
경마로 2억~3억원을 잃고 난 뒤에야 손을 뗄 수 있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 집을 팔고 경기 과천시로 옮겼다. 경마를 잊고 5~6년을 보냈다. 89년 경마장이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문제가 다시 시작됐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곳에 있다 보니 주말만 되면 자연스레 발길이 경마장으로 향했다. "결국 또 4억~5억원을 날린 채 아내가 하던 미용실 건물, 과천 아파트도 팔고 평촌으로 가게 됐지."
발길을 끊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몇 만원만 갖고 소일(消日)하는 수준이라는 그의 안쓰러운 변명(?)이 정부와 마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1회 구매 한도액이 10만원인데 무인자동발매기로 수백에서 수천만원까지 살 수 있는 게 현실"이라며 "규제를 해야 할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사감위)도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핑계로 손을 놓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를 포함해 도박산업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직접 행동에 나섰다. 300여개 시민단체로 이뤄진 '도박산업규제및개선을위한전국네트워크'가 도박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돕기 위해 '전국도박피해자모임'(전도모)을 결성한 것. 전도모는 도박 예방과 중독 치유 등의 국가정책수립 제안 등 시민감시자의 역할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도박폐해 증언을 통해 예방활동에 나설 참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다 '쪽박'차기 십상이야.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황씨가 전한 값비싼 깨달음이다. 전도모 관계자는 "인허가권 강제집행권한을 부여하는 등 사감위의 권한과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감위법을 개정할 것을 국회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사감위가 발행한 '2009 사행산업백서'에 따르면 국내 도박산업 총 매출액은 16조5,000억원, 카지노 경마 경륜 경정 등의 이용객은 3,932만명에 이른다.
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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