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살아있지만 시체나 다름없어 더욱 무섭다.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현대인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소스라친다. 미국에서 좀비영화가 꾸준히 제작되는 이유다. 개봉 첫 주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초능력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강동원과 고수의 얼굴이라고 목청 높일 분도 있겠지만) 좀비처럼 움직이는 서울특별시 사람들이다. 주류 한국영화에선 지극히 낯선 모습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는 할리우드식 B급영화가 충무로에도 드디어 이식되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기대를 품게 했다.
B급영화는 흔히 적은 예산을 들인 영화나 제대로 돈 들여 만든 A급 영화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를 가리킨다. 좀비영화를 포함한 공포영화나 공상과학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안정적인 수익을 내면서도 창의성을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돈 없으면 만듦새도 투박해지기 마련이지만 적은 예산으로 잭팟을 터뜨리거나 완성도를 인정받은 B급영화는 여럿 있다. 오늘의 제임스 카메론을 있게 한 ‘터미네이터’(1984)의 제작비는 고작 640만달러였다. 그러나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1991) 제작비는 1억200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터미네이터’가 제작비의 12배가 넘는 수익(7,837만달러)을 올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B급영화하면 할리우드의 제작자 겸 감독 로저 코먼을 빼놓을 수 없다. B급영화의 제왕 또는 대부로 불리는 그는 라는 호기로운 제목의 저서를 낼 정도로 수완이 좋다. 300여편의 영화를 제작해 280편 가량이 이익을 남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싸구려 영화만 만들어 돈을 챙기진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와 프란시스 코폴라, 조 단테 감독이 눈 밝은 코먼에 의해 발굴됐다.
‘초능력자’는 감독의 의욕이 느껴지지만 B급도 아니고 A급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가 눈에 거슬리는 영화다. ‘초능력자’의 당초 시나리오는 B급영화 정서가 가득했다고 한다. 투자자들이 낯설다는 이유로 B급영화를 꺼리다 보니 시나리오에 손을 댔고, 상업영화 포장을 씌워 개봉했다는 후문이다. 좀비라는 단어만 거론해도 투자자들이 손사래를 친다니 딱히 감독이나 제작자를 나무랄 상황은 아닌 듯하다. 다양한 소재 개발은 외면하고 안전한 시나리오와 기획에만 돈을 대는 투자자들의 모험정신이 아쉬울 따름이다.
참, 코먼의 수제자 한 명을 소개하지 않았다. 코먼 밑에서 영화 일을 처음 시작하고, 데뷔작 ‘식인 피라니어’도 만든 그는 2009년 역대 세계 최고 흥행작 ‘아바타’를 연출해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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