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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가을이 좋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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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가을이 좋으신가

입력
2010.11.1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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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구락부라는 모임이 있다. 인터넷에 쳐보면 '신촌 밤무대를 주름잡는 건달들의 모임'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나온다. 언뜻 들으면 무슨 조폭 단체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80년대 초입 대학시절, 신촌 언덕배미, 같은 하숙방에서 나뒹굴던 친구들의 모임이다. 하기야 친구 부친상에 신촌구락부 이름으로 조화를 보냈더니 그 동안 괴롭히던 직장 상사가 친구가 '조직'의 일원인줄 알고 놀라 고분고분해졌다는 실제상황도 있었다.

향수에 젖어 일상을 돌아본다

그렇지만 이름만 거창한, 하숙친구 모임일 뿐이다. 요즘 세대는 생경하겠지만 하숙이란 말은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는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말이다. 속옷 바꿔 입기는 보통이고, 고향에서 꿀이라도 올라오면 하루 밤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소 돼지고기를 뜻하는 육군, 계란과 닭고기를 의미하는 공군, 생선을 뜻하는 해군이라는 의미를 지금의 세대가 알기나 하겠는가. 모두가 곤고했던 시대, 반찬으로 육군을 요구하다 하숙집 아줌마에게 손이 닳도록 살살 빌고 쫓겨나는 것을 면했던 얘기들이 이제는 빛 바랜 전설이 된지 오래다.

또 한 해가 떠밀려 가고 있다. 신촌구락부란 이름 아래 하숙집 친구들이 때이른 송년 저녁으로 오랜만에 모였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풍요로운 음식을 마주하며 기성세대가 되어 다시 모였다. 처자식의 안부를 나누고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언제 잘릴 지 모르는 고민을 토로하고,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스마트폰의 스트레스를 얘기하고,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많은 화제 중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다. 짐승에게는 무리는 있어도 가족은 없고 어미는 있어도 아비는 없다. 그래서 인간의 가족제도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창조한 그 순간 시작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한자로 아버지 부(父)는 도끼를 든 모습, 곧 권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사라져 만 간다. 똑똑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태평양 건너 사라지고, 아버지는 라면을 끓이며 모니터에 잠깐 등장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아버지는 단지 생활비를 조달하는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엄마가 있어 좋다/나를 이뻐해 주어서/냉장고가 있어 좋다/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강아지가 있어 좋다/나랑 놀아주어서/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방송에 소개돼 화제가 된 라는 초등생의 글이다. "돈만 벌어 들여야 하는 기능적 아빠의 비애"라는 자조가 등장한다. 딴은 맞는 말이다. 이 땅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하루가 다르게 왜소해지고 있다. 그래서 한때 한국의 중년들이 이라는 일본영화에 열광하지 않았던가. 일본 북부 홋카이도의 눈 덮인 작은 철도역을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지방선 철도원의 일에 대한 사랑과 삶의 회한을 그린 작품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는,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한 고지식한 철도원의 가라앉은 인생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 땅의 중년들은 철도원에다 자신을 대입시켜 연민을 느끼고 공감했던 것이다.

상실감 커진 아비와 기성세대

어느새 가을의 끝 자락에 밀려 나 있다. 한때 북미 평원을 주름잡았던 아라파호 인디언은 11월을 두고 '아직은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한 해를 보낼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잠들기 전에 가야만 할 먼 길이 있다(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며 고단한 생의 영속성을 얘기했다. 저마다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남아 있는 2010년의 마지막 대목이, 쿠데타군처럼 소리없이 바싹 다가와 있다. 나이 들면 가을이 싫어진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남긴 말이다. 아비상실의 시대, 존재감조차 희미해져 가는 이 땅의 기성세대여, 가을이 좋으신가?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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