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 ․ 이초(李初)는 명나라에 “이성계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고자질했다. 그래서 명나라 에는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더구나 에는 “이인임의 아들인 이성계는 모두 4명의 고려왕을 죽이고 나라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태조의 종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묵묵부답으로 조선의 애를 먹이기도 하고, 다음 번 책이 개정될 때 고쳐 준다고 미루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이 문제가 풀리게 되었다. 홍순언이라는 역관 때문이었다. 홍순언(1530-~1598)은 북경에 갈 때 통주(通州) 부근의 유곽에서 죽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0냥을 달라는 기녀를 측은히 여겨 공금을 내어주고 그냥 왔다.
그 뒤 그녀는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고, 홍순언은 공금유용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 사신들이 올 때마다 홍순언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조선정부에서도 홍순언을 풀어주어 사신을 따라가게 했다. 그녀는 홍순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석성을 설득해 200년 묵은 종계무변의 한을 풀어주고 돌아올 때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글자를 수놓은 비단을 선물하기도 했다.
1584년(선조 17) 주청사 황정욱(黃廷彧)은 조선왕실의 종계를 고친 등본을 가지고 왔고, 1587년(선조 20)에 유홍(兪泓)을 파견해 원본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아직 황제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지 않았다. 유홍은 머리를 땅에 짓찧어 피를 흘리며 간청했다. 이에 감동한 명나라 황제는 의 조선종계 부분을 특별히 건네주었다. 그리고 1589년(선조 22) 성절사 윤근수가 전질을 받아와 종계변무는 일단락되었다.
석성의 도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석성은 당시 병부상서로서 황제를 설득해 조선에 원병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창궐하는 왜병을 몰아냈다. 석성은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이것은 조선이 무너지면 명나라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반대파들도 많았다. “오랑캐들끼리 싸우도록 놓아두지, 명나라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석성은 측근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휴전조약을 맺고 조선의 4개도를 일본에 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삼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그러나 심유경에게 속아 강화가 파탄나고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석성은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중대사들이 일개 역관 홍순언의 남아다운 한 번의 기개로 풀려나갔다는 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홍순언은 이 일로 공신이 되었으며, 그가 살던 마을은 지금도 보은단동으로 불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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