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62)씨가 일곱 번째 장편소설 (문학동네 발행)을 발표했다. 지난해 장편소설 를 출간한 지 꼭 1년 1개월 만에, 연재 없이 전작으로 발표하는 신작이다.
3인칭 시점과 남성적 어조를 주로 취했던 김씨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은 스물아홉 살 미혼 여성 조연주를 주인공으로 한다. 미대를 나와 디자인회사에서 일하던 그녀의 평온한 삶은 지방공무원인 아버지가 뇌물죄로 구속되면서 동요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상하급자와 결탁해 상습적으로 받아 챙긴 돈이 “알게 모르게 나의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이 곤혹스럽고, 곤경에 처한 아버지와의 이혼을 벼르는 어머니의 신경증적 태도에 피로를 느낀다.
설상가상, 다니던 회사의 경영난으로 떠밀리듯 퇴사한 그녀는 민통선 구역에 있는 국립수목원의 세밀화가 직에 지원, 도망치듯 집을 떠난다. 소설은 그녀가 수목원에서 나무, 꽃, 풀의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하며 보낸 2월부터 12월까지의 생활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여성 화자를 내세웠다고 해서 김씨가 예전과 확연히 다른 화법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조연주는 생의 치욕을 견디면서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와 그에 대한 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기고, 사진으로 찍어서는 드러낼 수 없는 식물의 ‘생명의 사실’을 세밀화에 담아내라는 상사의 주문에 난감해한다. 비루한 생에 대한 연민과, 표현할 수 없는 현상 너머의 것들에 대한 무력감으로 요약되는 그녀의 심리적 상황은 작가 김씨가 그동안 그려온 인물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1인칭 서술자의 등장으로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목소리가 좀더 또렷하고 직접적으로 들리는 느낌이다. 소설이 이따금 특유의 미문으로 쓰여진 김씨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 감상을 주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텐데, 김씨 스스로도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초여름까지 민통선을 여행하며 얻은 풍경, 식물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얻은 사유가 소설의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에세이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2001)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김씨는 이번 소설을 통해 급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문학적 변모를 보여준다. 세계에 대한 회의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소설의 주조로 삼아왔던 그가 조연주를 통해 희망과 사랑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나마 내비친 것이다.
민통선 내 수목원_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기관이다_은 애초 조연주에게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자기 유폐의 장소였지만, 이후 그녀가 식물의 생태와 더불어 삶과 인연의 의미를 깨쳐가는 회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숲은 나무와 잎으로 가득 차서 서걱이지만 숲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 잎지는 가을의 서어나무를 들여다보면서 때때로 아버지와 나의 인연의 끈을 생각했다. 가을에, 서어나무는 날마다 가벼워졌고 아버지는 수척한 몸으로 날마다 무너져갔다.”(265쪽)
나아가 조연주는 민통선에서 진행되는 군의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도와 뼈 그림을 그리게 된 인연으로 제대를 앞둔 김민수 중위와 가까워진다. 제대 직전 김민수는 취업할 회사의 명함을 조연주에게 건네고, 그녀 또한 그가 떠나고 사흘 뒤 수목원을 그만두고 그의 명함만 챙겨 서울로 돌아온다. 제대하자마자 취직해 부모 형제를 건사해야 하는 김민수에 대한 조연주의 감정은, 자폐아 아들을 혼자서 키우는 수목원 직속 상사 안요한에게 그녀가 느꼈던 연민과 얼마간 닮았지만, 그보다는 사랑이라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작가 김씨의 말이다. “이 소설의 결론은 명함 한 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빈약한 인연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근거이기도 한 것이죠. 이번 소설에서는 못 쓴, 명함이 가져온 뒷얘기, 이런 것이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겁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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